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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 선정
국가보훈처(처장 황기철)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권오설·이선호·박래원·이동환 선생을 ‘2021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4명의 선생은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일(인산일)을 기해 만세 시위로 일어난 학생 중심의 민족 독립운동인 ‘6·10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참여한 주요 인물들이다.
권오설 선생                이선호 선생                 박래원 선생                 이동환 선생
[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권오설 선생은 3·1운동 참가 이후 고향인 안동에서 학습강습소를 조직하여 교육운동에 힘을 쏟았으며, 농민운동도 전개했다. 가곡농민조합을 시작으로 선생의 농민운동은 1923년 풍산소작인회 결성으로 본격화되었으며, 식민지 사회 모순을 깊게 자각했다.  선생은 6·10만세운동의 모든 계획과 추진을 주도했으며, 만세시위 때 사용하기 위한 ‘격고문’과 그 밖의 전단 등을 직접 작성했고  6·10만세운동 관련 사건으로 체포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출옥을 며칠 앞둔 1930년 4월 1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하였다.
 
이선호 선생은 1925년 9월 조선학생사회과학연구회를 창립할 때 사업부 책임자, 1925년 11월 임시집행부 등에 선임되었다.  6·10만세운동에서 선생의 선창으로 중앙고보생 30여 명이 만세를 외치면서 격문서 약 1천여 장과 태극기 30여 매를 배포했다.  선생은 법정에서 “자유를 절규하면 자유가 생긴다는 결심으로 만세시위의 선봉에 나섰다”라고 했다. 선생은 징역 1년 형을 선고받았으며, 1927년 9월 20일 감옥에서 풀려난 뒤 일본으로 건너가 한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추구하는 노동운동에 종사하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히는 일을 거듭하다 1933년 귀국했다. 
 
박래원 선생은 1920년 천도교 청년회에서 천도교 청년동맹이 분리될 때 창립주역으로 활약했다. 선생은 인쇄직공 계통과 청년·사상단체의 화요회 계열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과정에서 권오설 선생과 깊은 동지적 관계를 이루었으며, 조선공산당과 천도교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선생의 도움으로 천도교로부터 6·10만세운동에 대한 적극적 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선생은 권오설 선생에게서 받은 자금으로 인쇄에 필요한 소형 인쇄기 2대와 용지, 활자, 기타 필수품을 구입해 인쇄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거사일이 임박하는데 자금이 없어 격문을 배포하기가 어려워지자 권동진 선생으로부터 흔쾌히 1만 원의 자금 지원 약속을 받았다.  선생과 천도교 관계자들은 격문의 지방배포와 지방조직과의 연락을 위해 계획을 세웠으나, 선생은 징역 3년형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동환 선생은 중앙고보와 중동학교 학생인 이동환, 박용규 선생 등 5명과 함께 통동계 소속으로, 이들은 6·10만세운동의 처음부터 거사까지 뜻을 같이한 동지였다. 선생은 총독부를 비롯한 일본기관과 일본인들의 집단 거주지인 충무로 일대의 폭파와 같은 보다 강력한 투쟁방법을 제시했다.  필요한 자금은 고향에서 보낸 생활비의 일부와 외투, 책을 팔아 마련했고, 이선호 선생과 중앙고보 동급생인 박용규 선생 등과 연락하면서 연대 투쟁을 추진해 갔다.  선생은 6월 10일 오후 2시경 동대문 밖 동묘 앞에서 박용규 선생 등과 함께 격문 7백여 매를 배포하면서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6월 19일 6·10만세운동의 주모자로 지목되어 중앙고보생 18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었으며, 1926년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받았으나, 경성복심법원의 공소심에서 1927년 4월 1일 징역 1년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네 명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권오설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선호 선생에게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박래원 선생에게 2005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이동환 선생에게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각각 추서했다. 

[방병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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