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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MOVIE] 맨발의 청춘 : 김기덕 작(1964년)

1964년 김기덕 감독이 만든 영화 `맨발의 청춘'은 시대의 대스타 신성일과 엄앵란이 출연했다.
젊은 남녀의 신분을 초월한 운명적인 사랑을 담은 영화로 이 현실에서 외면당한 채 결국 자살로 마감된다는 슬픈 이야기로 깡패인 서두수(신성일)는 건달 두목(이예춘)의 지시로 밀수한 시계를 운반하다 불량배들로부터 곤란을 겪고 있는 두 여대생을 구해준다. 
차에서 칼을 들고 내린 우두머리 불량배는 두수와 격투 끝에 자기 칼에 찔려 죽고, 두수는 도망가다 시계를 하나 흘린다.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두수가 지목되자, 덕태(윤일봉)는 자수를 권한다. 두수는 형사들에게 취조당하지만 그가 구해주었던 대사의 딸 요안나(엄앵란)의 증언으로 풀려난다. 외교관의 딸로 상류층의 생활에 젖어 있던 요안나와 고아 출신으로 조직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며 세월을 보내던 두수는 서로 다른 생활환경과 분위기에 놓인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독실한 기독교인인 요안나는 두수도 맘을 고쳐먹으면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어머니에게 두수의 일자리를 알아봐달라고 부탁한다. 그러나 이들의 연애를 단호하게 반대하는 어머니는 요안나를 태국으로 보내려고 한다. 이에 요안나는 두수와 함께 도피하며 시골 방앗간에서 슬프지만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다음날 아침, 한 노인이 정사(情死)한 두 사람을 발견해 경찰에 신고한다. 요안나의 호화로운 장례식에 비해, 고아인 두수는 아가리(트위스트 김)가 수레에 실어갈 뿐이다. 아가리는 두수의 맨발에 자신의 구두를 신겨준다.
 
`맨발로 왔다가 맨발로 가는 청춘'을 이야기하고 있는 이 영화는 청춘영화 주인공의 대명사로 알려진 신성일·엄앵란의 출연으로 더욱 주목을 받았으며 관객 수 약 21만 명을 달성한 당대 최고의 흥행작이다. 개봉일 당시 아카데미극장의 관객 행렬이 덕수궁 앞까지 이어졌다고 전해지고 있다. 당시 서울의 풍경과 중부경찰서, 시민회관, 장충체육관 등의 모습을 흑백으로 확인할 수 있다. 1964년 제2회 청룡영화상(미술상)을 수상했다. 한편 이 영화는 1960년대 서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는 점에서 미래유산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자료참고=한국영상자료원

[STAR] 대한민국 전설의 디바 패티김

대한민국 가요사에 빼놓을 수 없는 전설의 디바 패티김.
패티김은 한국 스탠다드 팝의 선구자로 이미자, 윤복희 등과 함께 1960년대 대표 가수로 1958년 미8군 무대에서 데뷔한 패티김은 최초, 최고라는 타이틀과 가장 어울리는 가수로 평가받고 있다.
해방 후 일본에 가장 먼저 진출했고, 우리나라 여가수로는 처음으로 미국 카네기 홀 공연과 시드니 오페라 하우스 등에서 공연했다.   가수 이미자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한 것도 주목받을 일이었다. 비슷한 나이대의 두 여가수는 언제나 비교의 대상이 되었다. 세련되고 도시적인 이미지의 패티김과는 달리 이미자는 `엘레지의 여왕'으로 불리며 눈길을 끌었다.
 패티김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바로 작곡가 길옥윤이다. 이 둘은 1966년에 결혼했다. 당시 길옥윤은 미국으로 돌아가야만 했던 패티김에게 프러포즈 송을 전하며 자신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 방송 인터뷰에서 패티김은 “3월 말쯤 됐는데 `4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를 작사해줬다. 가만히 들어보니 프러포즈인 것 같았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평소 내성적이었다는 길옥윤은 노랫말에 자신의 마음을 담아 전했고 두 사람은 그해 12월 결혼했다. 하지만 둘은 결혼 5년 만에 이혼 수순을 밟았다. 두 사람이 함께한 매가히트곡 `이별'을 발표한 지 1년 만이었다.
 패티김은 이혼 20년 후 길옥윤이 개최한 콘서트에 출연하기도 했다. 당시 패티김은 암 투병 중이었던 길옥윤에게 “왜 아프고 그러냐”며 “아프지 말라”고 전했다고 한다.
 한편 그녀는 2013년, 긴 가수 생활을 끝내고 은퇴를 선언하였다. 은퇴 전 그녀는 1년간 전국을 돌며 그동안 큰 사랑을 준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그녀가 무대를 떠난 지 10년이 가까워지고 있지만 아직도 그녀의 그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녀의 대표곡으로는 〈초우〉, 〈이별〉,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사랑은 생명의 꽃〉, 〈서울의 찬가〉, 〈그대 없이는 못 살아〉같은 수많은 히트곡이 있다.

[SPORTS] 영원한 `박치기 왕' 김일

TV가 귀하던 시절 한국의 1세대 프로레슬러 김일은 모든 국민을 TV앞으로 불러 모았다.
김일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TV가 있는 이웃집, 거리의 판매점 앞에는 동네 사람 모두가 모여 그의 화려한 박치기 기술에 울고 웃던 시절이었다.
 
한국의 1세대 프로레슬러 김일은 1929년 2월 전남 고흥군 거금도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 일본으로 밀항해 형무소에서 고초를 겪다 역도산의 제자로 들어갔다. 김일은 형무소에 복역하면서 당대 스타였던 역도산에게 “프로레슬러가 되고 싶다”고 편지를 보냈고, 역도산은 자신의 후견인이었던 오노 반보쿠 자민장 부총재에게 부탁해 김일을 형무소에서 풀어주고 그를 제자로 삼았다.
 
1958년 데뷔전을 치른 김일은 이후 1963년 세계레슬링협회(WWA) 세계태그챔피언, 1964년 북아메리카 태그챔피언, 1965년 극동헤비급 챔피언, 1966년 도쿄 올 아시아 태그챔피언, 1967년 WWA 세계헤비급챔피언, 1972년 도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오르는 등 30여 년간 20여 차례의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거머쥐며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프로레슬러로 성장했고 그 인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특히 그는 피니쉬 무브로 특유의 헤드 벗인 외다리 원폭 박치기가 유명해 `박치기 왕'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한국에서 활동하던 김일은 일본으로 돌아가 자신의 스승인 역도산이 만든 일본 프로레슬링 단체를 위해 활동했지만, 일본 프로레슬링계의 다툼으로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그후 고혈압 투병 등으로 선수생활을 마쳤지만 1995년 4월 6만 관중이 모인 도쿄돔에서 일본 은퇴식을 거행했다.

은퇴 이후에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을 위해 꾸준히 노력해온 그는 2006년 77세로 타계했다.
그는 국민훈장 석류장,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고 사후에는 체육훈장 청룡장이 추서되었으며,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영웅에도 헌액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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