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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FESTIVAL. 88 서울 올림픽

1981년 9월 30일 한국시간 밤 11시 45분 서독 바덴바덴에서 만세 소리가 울려퍼졌다.
 우리나라 수도 서울이 일본 나고야를 52대 27로 누르고 제24회 근대올림픽 개최도시로 결정된 것이다.
 4년마다 개최되는 세계 최대의 스포츠 축제 올림픽은 한 국가의 위상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계기로 여겨지고 있다. 
 1988년 9월 17일부터 10월 2일까지 약 한 달간 서울에서 개최된 제24회 서울 올림픽은 ‘화합·전진’의 기치 아래, 전세계 160개 국 1만 3,626명의 선수단이 참가해 올림픽사상 최대 규모로 진행된 경기였다. 특히 동서냉전이 한참이던 시절 냉전의 중심인 대한민국의 수도 서울에서 개최된 올림픽은 동서의 화해와 평화를 정착시키는 중요한 대회였다.
 전 대회인 1980년 소련 모스크바 대회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을 이유로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대거 불참했고, 다음 대회였던 1984 미국 LA 대회는 소련 등 동유럽 국가 18여 개 국에서 역시 불참했었지만 서울 올림픽은 동서 많은 나라들이 참석해 눈길을 끌었다.
 우리나라는 잠실올림픽경기장을 중심으로 34개의 경기장을 마련했고, 근대5종, 농구, 레슬링, 배구, 복싱, 사격, 사이클, 수영, 승마, 양궁, 역도, 요트, 유도, 육상, 조정, 체조, 축구, 카누, 탁구, 테니스, 펜싱, 하키, 핸드볼 등 237개 세부 종목으로 진행되었으며 대회휘장은 한국 전통문양인 삼태극을 그린 작품이고, 올림픽 마스코트는 한국산 호랑이(애칭:호돌이)를 상징으로 했다.
 이 대회에서 소련이 1위, 동독이 2위, 미국이 3위를 차지했고 우리나라는 금 12, 은 10, 동 11개로 종합 4위를 기록해 역대 최고의 성적을 거두기도 했다.
 한국은 올림픽 개최로 공산권 및 미수교국과 경제·문화·스포츠 교류를 활발히 추진하게 되었으며, 한국 국민이야말로 진정으로 평화를 희망하는 민족임을 실천으로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다.


SPORTS. 갈색 폭격기 차범근

세계 최고의 프로축구리그 영국프리미어리그(EPL)에서 득점왕이라는 전무후무한 성적을 올린 손흥민(토트넘 홋스퍼)이 국민들을 기쁘게 하고 있다. 하지만 손흥민에 앞서 우리나라에는 차범근이라는 걸출한 축구스타가 있었다. 
 1970년대 아시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각광받은 축구선수 차범근은 1953년 경기도 화성 출생, 화산초, 경신중, 경신고, 고려대를 졸업했다. 이후 서울신탁은행 축구단, 공군 축구단에서 활약하던 차범근은 만 26세의 나이에 당시 세계 최고 축구리그였던 독일 분데스리가에 진출해 10시즌 동안 308경기에서 98골을 터트렸다. 98골은 당시 외국인 선수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이런 활약으로 `갈색 폭격기', `차붐'이라는 별명을 얻었고 프랑크푸르트(1980년), 레버쿠젠(1988년)에서 각각 유럽축구연맹(UEFA)컵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프로에서 활약만큼이나 국가대표로서의 차범근의 명성도 대단했다. 차범근은 72년부터 78년까지 무려 118경기 55골을 넣었으며, 24세 139일로 세계 최연소 센추리 클럽에 가입하기도 했다.
 1989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은퇴한 차범근은 귀국 후 지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90년 현대 감독으로 취임했고 1998년 프랑스월드컵 때는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았다. 하지만 이 대회에서 네덜란드에 5:0으로 참패하는 등 좋지 못한 성적으로 월드컵 도중 사퇴하는 불명예를 안기도 했다. 1998년∼1999년 중국 프로축구 선전 핑안 감독을 맡았으며, 2001년부터 2006년까지 MBC 축구해설 위원으로 활동했다. 2003년 10월 K리그 수원삼성팀 감독으로 2010년까지 팀을 이끌었고, 2004년과 2008년 수원삼성이 K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2004 프로축구 올해의 감독상'과 `2008 K-리그 대상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차범근은 유소년 축구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1990년부터 시작한 차범근 축구교실은 우리나라의 훌륭한 선수들을 많이 발굴 육성하고 있다. 차범근 없는 한국축구는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우리나라 축구발전에 큰 기여를 했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ACCIDENT. KAL기 폭파 사건

1987년 11월 29일 바그다드에서 이륙한 KAL858편 보잉 707기가 미얀마 랑군 상공에서 공중폭발했다.
 이 사고로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사건발생 15일 후 인 12월 13일 양곤 동남쪽 해상에서 공기주입펌프 등이 파손된 KAL기 구명보트 등 부유물 7점이 발견되었고 비행 중 폭발해 추락한 것으로 확인됐다. 
 한국 입국이 금지된 `요주의 인물'인 일본인 2명이 탑승했었다는 한 언론의 특종보도 이후 수사가 급진전 되었고, `하치야 신이치'와 `하치야 마유미'라는 일본인으로 위장한 북한대남공작원 `김승일', `김현희' 두 사람이 12월 1일 바레인 공항에서 붙잡혀 조사를 받던 중 독약을 삼켜 김승일은 죽고 김현희는 살아났다. 
 당시 정부는 이 사건을 북한의 88올림픽 방해 책동의 일환으로 사건을 분석했고, 김승일과 김현희가 김정일의 친필지령을 받고 기내에 두고 내린 시한폭탄과 술로 위장한 액체폭발물(PLX)에 의하여 폭파되었다고 밝혔다.
 범인인 `하치야 마유미'라는 가명을 쓴 `김현희'는 다음 해인 1988년 1월 15일 TV기자회견에서 본인이 KAL858기 폭파범이며 북한 김정일의 사주로 88올림픽 방해, 선거분위기 혼란 야기, 남한 내 계급투쟁 촉발을 목적으로 KAL858기를 폭파했다고 밝혔다. 이후 김현희는 1990년 재판을 받고 사형이 선고되었으나 한국에 전향, 대통령 특사로 자유인이 되었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있던 우리나라에 범인 김현희가 대선 전날 서울로 압송되어 들어옴으로써 대통령선거에 최대 변수로 작용하기도 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사건 발생 10여 년 뒤 이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일부 피해자 유족이 2001년 청와대에 재조사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2009년 3월 11일 폭파범 김현희가 18년 만의 기자회견을 열고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의 테러가 분명하다며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가 벌인 자작극설이라는 의혹을 부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사건 발생 10여 년 뒤 이 사건에 의문을 제기하는 반응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에 따라 일부 피해자 유족이 2001년 청와대에 재조사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아직 이에 대한 결과는 나오지 않았으나, 2009년 3월 11일 폭파범 김현희가 18년만의 기자회견을 열고 KAL기 폭파사건은 북한의 테러가 분명하다며 1987년 대선을 앞두고 안기부가 벌인 자작극설이라는 의혹을 부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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