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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SOCIETY. 6·29 민주화 선언

박정희 대통령 서거 이후 신군부 세력이 정권을 잡은 후 1985년 2월 12일 총선 이후 야당과 재야에서는 간선제로 선출된 전두환 대통령의 도덕성과 정통성 결여를 비판하며 대통령 직선제를 주장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4월 13일 개헌논의를 금지하는 호헌조치를 전두환 대통령이 발효하면서 이에 반발한 시위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이런 상황에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회장이던 박종철 군이 경찰의 고문으로 사망하는 사건이 알려지면서 전국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6월 10일에는 전국 18개 도시에서 대규모 가두집회가 열렸고 학생들을 비롯해 일명 넥타이 부대라 불리는 일반 시민들도 시위에 참가해 박종철 군 사망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대통령 직선제를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전국 37개 도시에서 100만여 명이 넘는 시민들이 참석하기도 했다.
 정부는 군이 일정지역에 주둔해 경비와 질서유지 등을 펼치는 위수령과 군 투입을 검토하는 등 일촉즉발의 사태로 번져나갈 수 있었으나 당시 여당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 전 대통령이 국민들의 직선제 개헌요구를 받아들이겠다는 6·29 선언을 발표했다. 
 6·29 선언의 주요내용은 ① 여야 합의하에 조속히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하고,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를 통해 1988년 2월 평화적으로 정권을 이양하며, ② 자유로운 출마와 공정한 경쟁이 보장되는 대통령 선거법의 개정, ③ 국민적 화해와 대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김대중(金大中) 씨 등의 사면복권과 극소수를 제외한 시국사범 석방, ④ 인간존엄성을 존중하기 위해 개헌안에 기본권 강화조항 보완, ⑤ 언론자유의 창달을 위해 관련제도와 관행을 획기적으로 개선하며 언론의 자율성을 최대한 보장, ⑥ 사회 각 부문의 자치와 자율을 최대한 보장, 지방자치 및 교육자치 실시, 대학의 자율화, ⑦ 정당활동 보장, 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⑧ 밝고 맑은 사회건설을 위해 사회정화 조치의 강구 등의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선언으로 대한민국의 정치민주화에 큰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SOCIETY


MOVIE. 장군의 아들 시리즈

가장 존경받는 독립운동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 김두한의 일대기를 영화한 작품으로 임권택 감독이 1990년 연출한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의 88번째 작품으로 홍성유(洪性裕)가 쓴 《인생극장》(후일 영화와 동일하게 `장군의 아들'로 개칭)이 원작이다.
 일제강점기 때 소년 김두한이 밑바닥 생활에서 부터 시작해 대한민국 주먹계를 평정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당시 신인이었던 박상민(김두한 분), 신현준(하야시 분), 김승우(쌍칼 분) 등이 출연해 스타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주먹세계의 모습만이 아닌 일제시대 우리 국민들의 아픔도 잘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또한 당시 현란한 액션과 임권택 감독만의 섬세한 연출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일제강점기 고아였던 소년 김두한이 각설이 생활을 전전하다가 우연한 기회에 극장 우미관에 취직한다. 어느 날 김두한은 우미관패의 우두머리 김기환을 만나러 온 망치를 때려눕히고 종로 주먹계에 입문했고 당시 학생 주먹패 대장 신마적은 김두한이 장군 김좌진의 아들임을 알고 뒤에서 그를 키워준다. 또한 일본 야쿠자 패거리 두목 하야시가 조선의 심장과도 같았던 종로에 진출하려 하자 김두한은 일본 주먹계에 맞서 끊임없이 결투를 벌인다. 이 장면들은 오랫동안 관객들의 기억에 남게 되었다.
 흥행면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얻었는데 단성사에서 6개월간 상영되면서 서울에서만 60만 명을 동원했고 전국 관객 수 200만 명을 넘는 등 한국영화 100만 명 시대를 여는 작품으로 당시에는 지금과는 달리 멀티플렉스가 아닌 단일극장 체재였기에 지금으로 따지면 1,000만 명 이상의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1991년 2편, 1992년 3편이 개봉됐고 모두 흥행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1990년 11회 청룡영화상(신인남우상, 한국영화 최다관객상), 1991년 12회 청룡영화상(한국영화 최다관객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ACCIDENT. 이윤상 군 유괴살해 사건

1980년 11월 13일 소아마비 환자였던 중학생 이윤상 군이 납치된 사건으로 범인은 이윤상 군의 중학교 체육교사 주영형으로 밝혀져 더욱 충격을 준 사건이였다.
 공부를 잘하던 이윤상 군이 실종된 건 1980년 11월 3일로 서울 공덕동 집에서 1.5km 떨어진 마포고 앞으로 체육담당 주 교사와 교외상담을 하러 나간 뒤 소식이 끊어졌다. 같은 날 오후 8시쯤 40대 남자 목소리로 “당신 아들을 수원에 감금했다. 우리는 전과자들로 4명이다. 일본으로 밀항하려는 데 돈이 필요하다. 현금 4천만 원을 준비하라. 경찰에 신고하면 당신 아들을 죽이겠다”는 내용의 협박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은 이 군의 신변안전을 위해 비밀수사를 벌였지만 사건발생 1백5일 만인 81년 2월 26일 공개수사에 들어갔고 가족들은 1천만 원의 현상금까지 내걸기도 했다.
 공개수사 후 이 군이 소아마비를 앓은 장애인이라는 사실이 알려지자 전 국민들이 「윤상이 찾기 반상회」를 여는 등 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사건이다. 또한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5공화국 출범일인 3월 3일 이전까지 윤상 군을 부모 품으로 돌려보내면 선처하겠다”는 담화를 발표하는 등 정치권에서도 큰 관심을 가졌지만 1년 동안 이 군의 행적을 찾지 못했다.
 사건의 실마리는 쉽게 잡히지 않고 있다가 사건 발생 1년 만인 1981년 11월 30일 이 군이 다니던 중학교의 체육교사 주영형(朱永炯)이 범인인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인 주영형은 사범대학 체육교육과를 졸업하고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까지 취득한 대단한 엘리트였지만 여학생 제자들과 불륜을 벌이고, 도박 등으로 방탕한 생활에 빠져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주영형은 이 군을 유괴 후 이불을 덮어 질식사 시키고 사체를 북한강 둔치에 암매장했다. 이 과정에서 불륜 관계에 있던 두 명의 여고생도 범행을 도운 혐의로 함께 구속되었다.
 주영형은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항소, 상고 하였지만 대법원에서도 사형이 확정되어 1983년 7월 9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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