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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박건병·강경선·배천택 선생
2022년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한국독립당관내촉성연합회’ 결성 95주년을 맞이하여 항일운동 유일당 결성에 적극참여한 박건병, 강경선, 배천택 애국지사를 선정하여 그분들의 독립운동정신을 계승하고자 하였다.
[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 박건병
 강원도 철원사람이다.
 1919년 8월 11일 강원도 철원군 동송면(東松面) 도피안사(到彼岸寺)에서 김상덕(金相德)과 회합하여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군단(郡團:일명 철원애국단)을 설치하였다.
 동년 10월 10일 전단을 만들어 철원면내의 민가에 배포하는 한편 이날 오후 8시 철원면 사요리(四要里) 우시장에서 성조기, 만국기, 태극기를 게양하고 만세를 부르면서 군중들에게 시위운동에 참가하도록 활동하였다.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북경교외 삼패자(三牌子) 화원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軍事統一籌備會)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어 동년 9월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석하였다.
 1925년 6월 2일 북경에서 선두자사(先頭者社)의 명의로 조남승(趙南升) 등과 함께 「중국국민의 구국구족운동에 당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항일선전문을 배포하였다.
 1926년 10월 16일에는 상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韓國獨立唯一黨) 북경촉성회(北京促成會)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동삼성 화전(華甸)과 반석(磐石)으로 옮기면서 개최된 전민족유일당조직회(全民族唯一黨組織會)에 참석하여 항일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하여 활동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강경선
 평북 정주(定州) 사람이다.
 1920년 7월 중국으로 망명하여 동년 12월 상해에서 여운형(呂運亨) 등이 대한민국임시정부 거류민단 규칙에 기초하여 조직한 상해대한인거류민단(上海大韓人居留民團) 간사로 선임되어 약 1년간 상해지역 한인들의 자치활동을 통솔하는 한편, 임시정부의 민족운동을 후원하였다.
 1921년 11월 임시정부의 후원과 전시(戰時) 부상자의 구호를 목적으로 조직된 대한적십자회 상의원(常議員)으로 선출되어 김구(金九) 등과 국내의 화요파와 사회주의 운동을 통한 민족운동 방략을 모색하였다. 1923년 2월 임시정부의 태극단(太極團) 대표로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그는 안창호(安昌浩) 등이 주장하는 개조파의 성명을 지지하였다. 
 동년 10월 상해지역 재류(在留) 한인 독립운동가들이 조직한 교민단(僑民團) 의원으로 활동하던 그는 교민단과 중국 상해에 설립한 인성학교(仁成學校)의 운영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였다. 
 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의원, 동년 8월 교민단 총무, 1925년에는 임시의정원 평안도 대의사(代議士)로 선임되어 활동하면서 최석순(崔錫淳) 등과 함께 대통령 이승만(李承晩)의 탄핵안건을 임시의정원에 제출하여 이승만을 축출하는 데 앞장섰다.
 1926년 3월 1일 상해 불란서 조계에서 교민단장 대리로 한국독립선언기념식을 거행하였으며, 동년 10월 인성학교 교감으로 동포 자제들을 대상으로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7년 4월 중국 상해에서 개최된 한국유일당 조직 촉성회(促成會)에 참석하여 집행위원으로 선정된 그는 한인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남경에서 활동하다가 1930년 9월 피살되어 10여 년간의 독립운동을 마감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배천택
 경상북도 대구에서 태어났다.
 1909년 신민회 계열의 국권 회복을 위한 비밀 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안희제(安熙濟) 이원식(李元植) 남형우(南亨祐) 이시열(李時說)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여 나라가 망하자 봉천성 유하현(柳河縣)에 망명하여 부민단(扶民團)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3·1운동 후 서간도의 독립군단체로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이에 참가하였으며, 1923년 1월부터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에는 김동삼(金東三) 이진산(李震山) 등과 함께 서간도 독립군단체 대표로 참석하여 국민대표회의 비서장에 선임되었다.
 1927년 11월에 상해에서 각 지역 독립운동단체들의 통합을 위한 한국유일독립당촉성회 각지대표연합회가 개최되자 정의부의 대표로 이에 참석하여 독립운동단체들의 대동단결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1934년에 남경(南京)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창립하고 간부로 활동하였다.
 1935년 7월에 남경에서 의열단, 상해의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 신한독립당,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대한독립당(大韓獨立黨) 등이 통합하여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을 창립할 때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간부로서 활동하였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방송국을 통하여 일본 본토에 대한 일본어 방송과 한국 본토에 대한 한국어 방송을 맡아서 「일본민족에게 고함」 또는 「조선민중에게 고함」과 같은 방송을 계속하고 일제 강점 후 한국인의 생활의 영락을 폭로하며 국내의 독립운동을 고취하고 일제에 대한 비협력과 각종 형태의 독립운동에의 궐기를 호소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운동에 끼친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하였다.
 
[방병건 논설위원]
북경 촉성회 위원 명단(박건병, 배천택).상해 촉성회 선언문. 〈사진 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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