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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의 독립운동가]

이종암 / 엄순봉 / 이강훈
[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 이종암(1896∼1930)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대구농업학교를 거쳐 부산상업학교에 다니다가 1916년 대구은행에서 2년간 재직하였다.
 그는 1917년 만주를 왕래하며 독립운동에 뜻을 둔 동지와 함께 조국광복 투쟁을 결의,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밀양에 거주하던 김대지·구영필 등의 동지를 얻었다. 같은 해 12월 은행 금고 속에서 만 구백 원의 돈을 꺼내, 동지들과 함께 상해를 거쳐 만주로 갔다. 만주에서 그는 길림성 영안현 동경성(吉林省 寧安縣 東京城)의 간민소학교(墾民小學校)에 주소를 두고 1918년 2월에는 봉천성 통화현(奉天省 通化縣)에 있는 무관학교에 입학하였다.
 상하이 조계
 이어 1919년 3·1독립운동이 발발하자 독립운동에 참여하기 위하여 무관학교를 그만두고 1919년 11월 9일 길림성 파호문(巴虎門) 밖에서 김원봉·이성우·황상규 등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으며 그와 김원봉은 상해로 가서 불란서 조계(租界)에 사는 김성근에게 폭탄제조방법을 습득하였다. 이종암이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은 이러한 의열단의 활동자금으로 유용하게 쓰여졌고, 그 일부는 동지인 구영필에게 전해져 만주 봉천의 비밀결사인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치하는 자본금으로 쓰여졌다.
 1922년 3월 그는 김원봉·김익상·오성륜 등과 함께 필리핀에서 상해로 오는 일본육군대장 전중의일을 처단하기로 결정하고 전중(田中)이 3월 28일 상해에 상륙할 때 거사하기로 결정하였다. 거사 당일 전중이 상해의 세관부두로 상륙하자, 세관부두에 김익상과 오성륜 동지가 배치되었다. 그는 거사의 성공을 빌며 소식을 기다렸으나 불행히도 전중 암살은 실패하고 두 동지만 일경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1925년 9월 재정사정으로 활동이 힘들어지자 그는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을 계획을 세우고, 선전용으로 신채호가 작성한 의열단선언서(義烈團宣言書, 일명 朝鮮革命宣言書)를 지참하고 대구로 잠입하였다. 그곳에서 이병호의 안내로 이병태를 만나 자신이 전에 부산금융조합에 예금한 돈을 받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고, 그가 잠시 요양 중이던 경북 달성군 달성면 이기양의 산장에서 1925년 11월 5일 일경에 붙잡히고 말았다. 그는 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3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1930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엄순봉(1906∼1938)
 경북 영양 사람이다.
 일찍이 만주에 망명하여 1929년에 북만주 석하(石河)에서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고 청년부장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또한 재만주 조선인 아나키스트 연맹에 가입하여 이준근, 이붕해, 이강훈 등과 함께 활동하다가 상해로 갔다. 1933년 8월 그곳에서 흑색공포단에 가입하고 옥관빈의 변절 행위를 묵과할 수 없어 그를 처치하였다.
 그리고 상해남화한인청년연맹(上海南華韓人靑年聯盟)에 가입하여 당원이 된 후, 일본공사인 유길명을 암살하려다 미수에 그쳤다. 1935년 3월 25일에는 상해 조선인 거류민 회장인 이용로의 악질적 밀정 행위를 참을 수 없어 그를 총살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1936년 4월 24일에 경성복심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어 1938년 4월 9일에 사형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이강훈(1903∼2003)
 강원도 김화 사람이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시위에 참가하고, 이듬해 상해로 건너갔다. 이곳에서 임시정부의 일을 돕다가 북간도로 되돌아가 국자가(局子街)의 사범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1924년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김좌진의 지시로 안도현 삼인방(安圖縣 三人坊)의 백두산 근방에서 둔전제(屯田制)를 위한 신창학교(新彰學校)의 교사로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1929년에는 한족총연합회에 가입하여 동북만(東北滿)에서 활약하였으며, 동년 12월 10일에는 해림에서 북만민립중학기성회(北滿民立中學期成會)를 개최하고, 이지산·김야운·김유성·전명원·김종진 등과 민립중학을 설립하여 교포 청소년들에게 조국광복을 위한 민족정신을 고취시키는데 기여하였다. 만주에 대한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그는 1932년에 대련을 거쳐 다시 상해로 망명하였다. 
 그는 1930년에 유자명·정화암·백정기 등이 재중국조선아나키스트연맹(在中國朝鮮 anarchist聯盟)을 개편하여 창립한 남화한인청년연맹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1933년 3월 17일 일제의 주중(駐中)공사 유길명이 일제의 황목(荒木) 육군대신의 명령으로 친일 중국 정객(政客)을 매수하여 독립운동을 방해하기 위한 음모를 세웠는데 이를 탐지하게 된 그는 남화한인청년연맹의 행동단체인 흑색공포단 오면직·원심창·백정기·이달·김지강·유기문·엄순봉 등과 같이 조직하였으며, 구파 백정기와 같이 유길명을 폭살하기 위한 실행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에 권총과 폭탄, 수류탄 등을 휴대한 이들은 회합장소인 6·3정 부근에 대기하고 있었으나, 이 계획이 사전 노출되어 일본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백정기는 장기(長崎)형무소에서 옥사하였고, 그는 1933년 11월 24일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5년 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1940년에 징역 8년 11월 7일로 감형되어 1942년 7월 2일에 그 형이 종료되었으나, 일제는 그가 민족의식이 극히 농후하여 재범의 염려가 현저하다는 이유로 동년 7월 18일 웅본(熊本)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예방구금(기한 없는 구속)이라는 판결을 하게 되어, 1945년 10월 10일 조국 광복으로 출옥 시까지 다시 동경 교외에 있는 부중(府中) 감옥에 갇혀 있어야 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2023년 10월의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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