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교 / 최낙철 / 신기철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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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교 선생 최낙철 선생 신기철 선생 |
▲ 서상교
대구상업학교 재학 중 1942년 5월 동교생 이상호·김상길 등과 함께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하고 태극기를 상징하여 항일학생결사 태극단을 조직하였다. 태극단의 조직은 크게 일반조직, 특수조직으로 나누었다.
일반조직은 다시 육성부 아래 관방국·체육국·과학국 등 3국을 두고, 그 밑에 군사부·항공부 등 10여 부(部)를 두어 체계화했으며, 특수조직은 건아대(健兒隊)라 칭하여 중학교 1·2학년생과 국민학교 상급반 학생을 대원으로 가입시켜 이들을 장차 단원으로 육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체육국장의 일을 맡아 단원의 연성활동(鍊成活動)을 지도·감독하였다.
한편 태극단의 투쟁방략은 조직 확대를 통하여 전국의 학교와 각 지역별로 조직을 완성한 후 여론을 환기시키며 본격적인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것인데, 만약 국내에서의 투쟁이 여의치 못할 때에는 중국으로 집단 망명하여 그곳에서 항쟁을 계속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태극단원들은 용두산·비파산 등 비밀장소를 이용하여 학술연구토론회·각종 체육회 등을 개최하여 동지간 유대의식과 민족적 교양의 함양 및 체력증강에 힘을 쏟았으며 군사학 연구에도 정진하여 군사관계서적의 번역, 글라이더 및 폭발물 제조에 관한 연구를 추진하였다.
1943년 5월 배반자의 밀고로 태극단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되었고,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44년 1월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단기 5년, 장기 7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소년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최낙철
전북 무주 사람이다.
대구사범학교 재학 중인 1941년 1월에 동교생 임 굉·이태길·장세파·김영복 등 동교생들과 함께 당시 대구 동운동 소재 이무영의 집에 모여 항일학생결사 「연구회」를 조직하였다.
동회는 조국독립을 위한 실력배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한 단체로서, 회원들은 당시 국제정세를 분석하여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다가올 조국의 독립에 대비하여 실력을 양성해서 독립 후 각기 전문 분야의 최고 권위자가 될 것을 결의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학술연구를 표방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회의 운영을 위해 비밀엄수·매월 10일 연구발표·하급생지도 교양 및 동지모집 등의 운영방침을 정하고 또한 각 부서를 정했는데 그는 지리부 책임의 일을 맡았다.
동회는 1941년 2월부터 1941년 3월까지 6회에 걸쳐 모임을 갖고 활동 및 결의사항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장기적인 사업계획을 세웠다. 졸업 후 각기 국민학교 교사로 부임하게 되면 우수한 아동들에게 수재교육을 실시하여 독립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회원들은 현지에서의 활동상황을 공문으로 위장하여 매월 1회,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는 1941년 3월에 동교를 졸업한 뒤, 함경북도 나진의 약초공립국민학에 교사로 근무하면서 동회의 사업을 수행하였다. 그러던 중 1941년 7월에 대구사범 윤독회의 간행물인 <반딧불>이 일경의 손으로 들어가게 됨에 따라 대구사범의 항일결사의 전모가 드러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일경에 붙잡힌 그는 혹독한 고문을 받으며 2년 이상 미결상태에 있다가 1943년 11월 대전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8·15광복으로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신기철
강원도 춘천(春川) 사람이다.
1937년 3월에 조직되었던 춘천고등보통학교의 항일학생결사 상록회는 회원의 졸업으로 해체될 형편에 이르자 1938년 3월에 재편성을 하게 되었다. 이때 새로이 부서를 정하고 신입회원을 가입시켰는데, 그는 서적계의 일을 맡았다.
그 후 동회는 다시 조직을 확장하고, 소양로 소재 박태주 회원의 집에서 간부진을 개편하였는데 그는 회장직을 맡았다. 상록회의 주요활동은 월례회·토론회·독후감 발표회 및 귀농운동 등으로서 주로 독서활동을 통한 항일의식을 고양하는 것이었다.
또한 졸업생 회원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맺고 있었는데 그와 이봉채 등은 선배회원 신영철·이홍래·박우홍 등과 우두산(牛頭山)·봉의산(鳳儀山) 등지에서 비밀리 모임을 갖고 토론, 강좌를 통하여 항일의식을 함양하였다.
이렇듯 상록회의 주요회원으로 활동하던 중, 1938년 가을에 상록회의 조직과 활동이 일경에 발각됨으로 붙잡혔다. 그는 1년여 동안 모진 고문을 당하다가 1939년 12월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방병건 회장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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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날 : [2023-11-09 12:19: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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