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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월의 독립운동가

이승만 초대 대통령
(사진=위키백과)
▲ 이승만
 황해도 평산(平山)사람이다.
 1894년에 신긍우(申肯雨)의 권유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며, 배재학당에서 진보적인 개화당 관계의 청년들과 많이 접하게 되어 그 자신도 진보적인 사상을 갖게 되었다.
 1896년에 서울에서 서재필의 지도로 협성회를 조직하였으며, 협성회보(協成會報)라는 주간신문을 발간하고 주필이 되어 정부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전개하였다. 이에 따라 협성회보는 정부 탄압이 심해져 폐간되었고, 그 뒤 매일신문이라는 일간지를 발행하고 주필로서 계속 활동하였다.
 그 당시 독립협회는 서재필·이상재·남궁억이 주축이 되어 민권운동을 전개하였으나 1898년에 황제의 노여움을 사 독립협회는 해산 상태에 처하게 되었고 서재필은 미국으로 추방되었으며, 이상재와 남궁억도 체포되었다.
 이때 그는 「광무황제는 연령이 높으시니 황태자에게 자리를 내주셔야 한다」라고 하는 전단을 배포하였는데 그 혐의로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이 감옥에서 그의 정치사상을 가장 잘 표현한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저술하게 되었는데 그 내용을 살펴보면, 첫째로 「세계와 마땅히 통하여야 할 줄로 안다」고 하여 국제간의 외교, 다른 나라와의 통상, 외국인과의 친선 등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로 「새 법으로써 각각 몸과 집안과 나라를 보전하는 근본을 삼을 것」이라고 하여 주로 새 질서 추구, 생활개선, 낡은 사고방식에서의 탈피 등을 주장한다. 셋째로 「외교를 잘할 줄 알아야 한다」는 전제를 붙여 놓고 국제사회와의 균등한 외교를 확보함으로써만 약소국은 열강에 끼어 살 수 있다고 표현하고 있다. 넷째로 「국권을 존중히 여겨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치외법권을 물리칠 것, 민족적 자존심을 가질 것, 국기를 소중히 여길 것, 외국에 입적하지 말 것 등을 강조하고 있다. 다섯째는 「의리를 존중하라」고 하면서 정의와 대의에 죽을 줄 알아야 한다고 하여 국가에 대한 국민적 모럴을 강조한다. 여섯째는 「자유권을 중히 여길지라」하여 민주주의의 기본인 개인의 자유, 평등과 이를 확보하기 위한 권리, 의무에의 충실을 강조하고 있다.
 1904년 노일전쟁이 발생하고 민영환 등 혁신파가 정권을 잡게 되자 7년 만에 석방되어 11월에 미국으로 떠났다.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1905년부터 1910년까지 워싱턴 대학, 하버드 대학, 프린스턴 대학 등을 순례하면서 새로운 문물과 새로운 학문을 접한 뒤 1910년에 귀국하였다.
 1912년 세계감리교총회 한국대표로 임명되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이 총회의 연설에서 그는 기독교 정신과 민주주의 이념인 자유·평등·인류애에 호소하면서 일본에 약육강식 당한 한국의 실정을 소개하고 국제 여론은 마땅히 한국을 불합리한 상태로부터 해방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라고 호소하였다.
 그는 주로 하와이에 근거를 두고 「한국·태평양」이라는 신문을 발간하였고, 박용만·안창호와 협력하여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윌슨 대통령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에 힘입어 동지들과의 연락 아래 대표를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도록 진력하여 김규식 등이 그 회의에 참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고 4월에 상해에서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되었다.
 1921년 5월에는 워싱턴 군축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침략상을 폭로하였으며 1933년 제네바 국제연맹회의에 참석하여 일본의 한국 병탄(倂呑)과 만주 침략의 부당성을 폭로하였다.
 1934년에 오스트리아 여성인 프란체스카 마리아 여사와 결혼하였다.
 1940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 구미위원장이던 그는 VOA를 통하여 국민들의 단결을 호소하는 육성방송을 실시하여 희망과 용기를 북돋웠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광복을 맞이하게 되자 1945년 10월 16일에 귀국하여, 「뭉치고 엉키라.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못 사나니 다 같이 하나로 뭉치자」고 역설하였다.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고 초대 대통령에 취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하여 1949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방병건 회장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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