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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집을 나서는 남자! ①

김 용 제 도시농업전문가

나는 서해안에 인접한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장포리라는 농촌 마을에서 1942년에 태어났고 올해로 74세가 되었다.


그 시절 모내기 철이 되면 하늘만 쳐다보며 비 오기만을 기다리는(天水畓) 저수지가 없는 곳, 먹거리가 부족해 때로는 초근목피(草根木皮)로 끼니를 때우던 이야기는 비록 우리 가족만의 일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학교 수업이 끝나면 부모님의 농사일을 돕는 것이 지금으로 치면 학원가는 일인 셈이었다.


비록 농업고등학교 2학년 어린 나이지만 가난을 벗어 날 수 있는 방안을 찾으려 골몰하다가 그 당시 특용작물인 대파를 재배할 것을 착안하여 부모님께 건의하였더니 부모님께서는 나의 제안을 흔쾌히 허락하셨고 온 가족이 함께 정성 들여 훌륭한 작품을 생산하게 되니 일반 작물에 비해 대여섯 배나 많은 소득을 얻게 되어 주변의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받았고 이웃들에게도 좋은 경험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잠깐 소문을 타고 너도나도 따라 짓기를 하여 재배면적 초과에 따른 가격 폭락으로 채산성이 떨어져 대파 농사를 접기로 하고 새로운 소득원을 찾아간 곳이 접경지역인 보령군(현 보령시)에 위치한 2만 정보의 광활한 새로운 간척지였다. 수리시설은 잘되어있으나 바다 염분의 피해로 벼 재배가 거의 불가능한 불모지였다.


그러나 여기서 포기할 수 없어 나름대로 원인분석과 염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묘책을 찾다가 ‘물 깊이대기 농법’을 찾아낸 것이 적중하였고, 그 방법이 지역 주민들에게 모범사례가 되어 표준화되면서 불모지에 가까운 땅이 단기간 내에 옥답이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꽤 유명한 농부가 되었던 것이다.


얼마쯤 지나 그곳 옥답에는 보령군(현 보령시)에서 ‘벼 다수확 집단 시범포’로 지정되면서 농촌지도소(현 농업기술센터)의 지도를 받으며 남다른 창의력과 근면으로 ‘3년 연속 다수확왕’ 수상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당시 다수확왕이 되면 군내 유지들을 모아 품평회를 열어 사례발표를 해야 했고 많은 손님과 동네잔치를 하는 비용을 상품으로 충당하기에는 어림도 없이 모자랐다. 다만 성공한 농부에게는 최고의 명예와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이후부터 본인이 농약 통이나 비료 포대를 들고 들에 나갈 때면 지금처럼 휴대전화가 없던 그 시절 동내 여기저기서 큰 목소리로 들녘 멀리에 있는 가족에게 용제 씨네 ‘농약 주러 간다’, ‘비료 주러 간다’라는 메아리가 울려 퍼졌다. 우스운 이야기로 본인을 따라서 하라는 소리였다.


이후 가정을 꾸리고 농림직으로 서울로 발령받아 직장과 도시라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안이함보다 모험을 마다치 않는 본인의 개성 탓에 희비애락(喜悲哀樂)을 겪게 되었다.


2000년 외환위기 때 후진들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명예로운 퇴직을 하고 다른 직장에서 봉사하면서 좋아하는 테니스와 서울시 외곽에 있는 텃밭일로 심신을 단련하며 집에 눌러있지 못하는 성격이 건강 하나만은 확실히 유지할 수 있게 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가끔씩 노인정에 가서 바둑이나 장기를 두기도 해 보았지만, 농작물 재배에 비하면 낙엽 떨어지는 소리나 들려오는 정적인 느낌이 싫어서 발길을 돌리곤 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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