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은 행복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렇게 잘사는 우리나라에서 무엇이 그들에게 행복감을 주지 못하고 항상 나는 불행하다고 느끼고 은둔하며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만 나열하여 지적하고 오늘도 하루를 허송된 세월로 보내면서 다른 사람과 항상 비교하여 자신의 처지가 불행하다고 단정한다. 그들은 우리 사회를 바라보는 눈이 한결같이 부자들과 권력자들만 잘살고 우리 사회를 지배한다고 망상에 가까운 체념에 빠져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대한민국만큼 자유를 향유하는 나라는 없다. 누가 무어라 해도 타인에게 해만 끼치는 폭력성만 없으면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고, 심지어 가짜뉴스를 양산해도 법적 처벌까지는 수개월이 걸려서 훈방 정도로 끝나고 만다. 생계를 걱정하는 160만여 명에게 최소 생계비를 지원하고, 아픈 자에게 의료비를 주거와 교육이 어려운 분들께 ‘맞춤형 복지’를 통하여 약 240만여 명이 국가적 지원을 받고 있는 나라이다.
그러면 왜 우리는 자신을 불행한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10억 아파트에 살지 못해서 그 많은 고급 레스토랑에서 폼을 잡고 식사를 못 해서, 아니면 고급 백화점에서 샤넬 명품 가방을 사지 못하는 주머니 사정에 삶의 허무감을 느끼는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빈부의 격차는 인정해야 하고 열심히 법을 위반하지 않고 돈을 벌어서 부(富)를 향유하는 그들에게 일방적 비판의 대상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나라는 세계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여 세계인들이 부러워하고 대한민국을 동경한다. 60년대 대한민국이 아니라 세계 선진국과 하등 차이 없이 당당히 경쟁하며 미래를 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미래사회의 선도적인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사회적 가치는 각자의 위치에서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는 성찰이 필요하다. 과연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나의 사고가 좀 더 개방적이지 못하고 부정적인 사고에 짓눌리고 있지는 않은지, 곰곰이 생각하는 시간들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미래사회는 열심히 달려가도 우리가 해결하지 못한 위험의 악재가 다가온다. 당장 인구 고령화로 인한 생산인력의 부족 현상이 나타나 산업이 후퇴하고, 기후 온난화 변화로 인한 생태계 충격이며, 갈수록 확대되는 빈부격차에 의한 사회 갈등 등 우리 자신들이 풀지 못하는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이런 확대적인 고민보다 우리 내면 안으로 들어가 우리의 남은 삶의 여정 속에 얼마나 행복하게 살게 될까 셈하니, 참으로 빠른 세월을 실감한다.
인간의 년 수는 70이요 강건하면 80이라 하였지만, 그래도 100세 인생이 목표가 되어 998824를 모두가 기대하고 있다. 실제 평균수명도 여자는 86.3이요 남자는 80.3에서 평균은 83.3이라 70년대에 비하면 많이 높아져, 남은 여정을 어떻게 아름답게 보낼 것인가를 생각하니, 그 답은 오직 하나이다. 행복한 삶을 구가하는 것이라 확실히 정의하지만, 그 행복은 내 스스로 찾아야 하는 숙제가 있다.
충북 음성군에 1976년 오웅진 신부가 세운 ‘꽃동네’ 사회복지시설이 있어, 지금은 노인, 장애, 아동 포함 2천여 명이 돌봄을 받는 입소 시설에, 필자가 자원봉사로 인연을 처음 1994년에 맺었다. 그 당시 중증 장애인실에 35세 된 배영희 자매가 입소 되어 있었는데, 그는 뇌막염으로 부모로부터 버림받고 시설에 입소 때 19세 어린 나이에 혀를 깨물며 자살을 기도했지만, 수녀님과 자원봉사자들의 정성으로 다시 삶을 찾아 자작 시 ‘나는 행복합니다’에서 오직 들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글을 쓸 수 있는 재능을 주신 이를 찬양하는 아름다운 시(詩)에서 강건한 육체를 가진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가를 배우게 된 동기가 되었다.
지금 우리 주위를 돌아보며 얼마나 감사한 일들이 많은지 하루 하나씩 찾아보며 내가 불행하다는 자신이 부끄러움을 느낄 것이다. 파랑새는 저 멀리 있는 곳에 있지 않고 바로 우리 집 처마 끝에 있음을 깨닫는 순간 난 행복하다고 스스로 고백하게 된다. 좀 더 여유로운 가운데 자신을 행복하다고 칭찬하는 소리에 보람찬 하루가 시작되고 당당한 삶의 원기가 살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