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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식 논설위원 |
해마다 마지막 12월 캘린더를 보노라면 또 한 해가 저문다는 초조감을 갖게 된다. 이렇게 세월이 빠르다 보니 남은 우리의 여생도 점점 압박으로 다가와 아는 사람들의 부고 소식에 나 역시 민감하지 않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이 남자 80.5 여자 86.5 평균 83.5세로 발표되어서, 그 기준으로 맞추면 나의 삶도 이제 성경이 말하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는 말씀에 이르고 있어, 이제 죽음의 문턱에 서서히 다가가는 자신을 돌아본다.
노인대학 교육 시 웰다잉(Well Dying) 죽음 공부 과정에 앞으로 언제까지 살기를 원하는가? 하는 질문에 모두가 9988234를 원하지만 결코 그렇게 되는 삶이 아니다. 어느 순간에 나에게 밀려오는 건강의 적신호는 내 생명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있음을 깨닫게 되고 병상에서 10년여 오래 더 살아 보는 것보다 평균수명이라도 살다 가면 ‘행복한 죽음이다’고 생각해야 한다.
요즈음 요양병원이나 요양원에서 인간의 존엄을 훼손당하면서 연명하고 있는 노인들을 볼 때면 차라리 오래 살기보단 평균수명까지 살아서 어느 순간에 고요히 잠자리에서 자다가 심장마비로 죽음을 맞이하는 마지막이 오히려 더 행복한 죽음이고 존엄한 여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자녀들에게 유언의 말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 80세가 넘으면, 꼭 유언장을 남겨두라고 말한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죽음을 맞을지 모르는 것이 인생이므로 항상 우리는 웰다잉에서 말하는 죽음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고 죽음은 대신하거나 경험하지 못하는 한계가 있어 서서히 준비함이 필요하다. 항상 내 인생이 한 달이 남았다는 생각으로 버리고 싶은 것을 찾아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있어야 하고, 나의 사망기도 한 번쯤 써 봄으로 지금부터 나의 삶을 새롭게 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다. 나는 이미 90세를 내 삶의 마지막으로 기록해 두고 산다. 그다음 남은 내 여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으로 생각하고, 오래전부터 기도하는 제목이다.
한 해가 저물면서 우리는 처음 신년 벽두 올해는 이렇게 해야지… 이런 삶을 살아야지… 계획을 세우고 출발하지만, 조금 지나고 보면 잊어버리고 게을러 세월을 보내다 보면 가을을 맞고 겨울을 맞는 것이다.
올해도 마찬가지로 나 역시 9가지 목표를 적어 컴퓨터 앞에 붙여 놓았지만 그대로 된 것은 30%도 안 된다. 왠지 나태해지는 평상의 삶에서 연말이 다가오니 다시 정신을 차려보지만 이미 한 해는 기울고 있다. 그중 제대로 실천했다면 하루 8천 보 이상 걷는 건강 지킴은 그런대로 여전히 하고 있다.
그러나 나머지는 언제 내가 그런 약속을 나에게 했지, 하는 무감각에 급하게 행동하고 남을 편하게 대하지 못한 나를 발견하게 된다. 수시로 보내오는 가짜뉴스에 내가 아끼는 친구를 보내는 직설적인 성격과 훈계하는 샌님 같은 고지식함을 다시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둥글둥글하게 살아가야 하는데, 왜 눈에 거슬리면 참지 못하고 바로 잡아 주면서 가르치려는 내 꼰대 같은 모습이 제발 내년에는 시정되어야 할 습성이다.
공부를 하겠다고 영어책을 사서 열심히 쓰고, 듣고 제법 기초회화는 되는 자신감을 가졌는데 어느 순간에 미루다 보니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착오를 범하고 있다. 외국어는 지속적으로 들어야 하고 최소 하루 2시간은 매달려야 됨을 아는데 왜 실천이 안 될까? 노인이 되어가면서 노인티를 벗어보고자 흰 눈썹도 아침마다 검은 화장을 아내의 승인(?)하에 한다.
근간에 요양보호사 수강생들의 나이가 점차 젊어져 40대가 공부하니 가르치는 나 스스로가 할아버지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 옷도 가급적 바지가 좁은 것을 입고, 와이셔츠도 새것으로 60대로 보이기를 준비한다. 그런데 근간에 한 수강생으로부터 강의 사례가 너무 꼰대라는 원장이 전하는 말에 놀라고 ‘언제까지 강의를 할 생각이냐’는 물음에 너무 충격을 받았다. 내 자만에 빠져 열심히 강의하면 80까지 하겠다는 생각의 착각에 혼선이 와서 며칠 동안 번 아웃이 되어 우울증이 올 것 같았다. 한 해를 다시 돌아보며 자신을 다시 반성하는 기회를 갖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