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
CULTURE. 홍콩영화
오징어 게임, BTS, 기생충, 윤여정 등 세계인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우리 문화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1980년대에는 홍콩영화가 많은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온 성룡과성냥개비 하나를 입에 물고 나타난 주윤발에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홍콩영화는 느와르, 무협, 쿵푸, 멜로, 무협, 판타지를 넘어 중국 귀신인 `강시'라는 장르까지 한국관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영화가 `영웅본색', `첩혈쌍웅', `도신', `호소자', `에스마담', `첨밀밀', `강시선생', `천녀유혼' 등 그 수도 상당하다.
배우들의 인기 또한 상상초월이었다.
주윤발, 성룡,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이연걸 등 남자배우들은 물론 왕조현, 장만옥, 임청하, 매염방 등 여자배우들도 큰 인기를 누렸고, 우리나라 CF에도 다수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는 다양한 장르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꼽는다. 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오랜 기간 영국의 통치를 받아온 홍콩은 가난한 우리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군사독재에 시름하던 우리와는 다르게 서구식 자유가 보장된 홍콩의 모습 또한 신선했다.
작은 도시에 불과한 곳이지만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고 국제적인 금융 도시가 된 홍콩은 중화문화와 영국문화, 미국 할리우드 문화까지 섞여 다양한 색깔을 보였고, 이런 색깔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군사정권 아래 있던 우리에게 이런 자유로운 창작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다양한 장르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을 훔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홍콩영화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이 확정되고, 천안문 항쟁 등이 홍콩영화 쇠락의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명성을 누리던 홍콩의 많은 배우들은 할리우드 등으로 진출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점도 홍콩영화 쇠락의 한 영향으로 보고 있다.
오징어 게임, BTS, 기생충, 윤여정 등 세계인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우리 문화가 최전성기를 누리고 있지만 1980년대에는 홍콩영화가 많은 인기를 누리던 시절이 있었다.
명절이면 어김없이 찾아온 성룡과성냥개비 하나를 입에 물고 나타난 주윤발에 열광하던 시절이었다.
홍콩영화는 느와르, 무협, 쿵푸, 멜로, 무협, 판타지를 넘어 중국 귀신인 `강시'라는 장르까지 한국관객의 큰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영화가 `영웅본색', `첩혈쌍웅', `도신', `호소자', `에스마담', `첨밀밀', `강시선생', `천녀유혼' 등 그 수도 상당하다.
배우들의 인기 또한 상상초월이었다.
주윤발, 성룡, 유덕화, 장국영, 양조위, 이연걸 등 남자배우들은 물론 왕조현, 장만옥, 임청하, 매염방 등 여자배우들도 큰 인기를 누렸고, 우리나라 CF에도 다수 출연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에는 다양한 장르에서 자유로운 창작활동을 꼽는다. 아시아에 위치해 있지만 오랜 기간 영국의 통치를 받아온 홍콩은 가난한 우리에게는 동경의 대상이었다. 또한 군사독재에 시름하던 우리와는 다르게 서구식 자유가 보장된 홍콩의 모습 또한 신선했다.
작은 도시에 불과한 곳이지만 무역 거점으로 떠오르고 국제적인 금융 도시가 된 홍콩은 중화문화와 영국문화, 미국 할리우드 문화까지 섞여 다양한 색깔을 보였고, 이런 색깔은 자유로운 창작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 군사정권 아래 있던 우리에게 이런 자유로운 창작은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고, 다양한 장르에서 보여지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우리 마음을 훔쳤다는 것이 중론이다.
하지만 홍콩영화도 1990년대를 기점으로 점차 쇠락하기 시작한다. 홍콩이 영국에서 중국으로 반환이 확정되고, 천안문 항쟁 등이 홍콩영화 쇠락의 요인으로 꼽히고 있다. 명성을 누리던 홍콩의 많은 배우들은 할리우드 등으로 진출했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한 점도 홍콩영화 쇠락의 한 영향으로 보고 있다.
STAR. 한국 가요의 자존심 `나훈아
우리나라 노래방에 수록된 곡이 가장 많은 가수 나훈아.
1966년 데뷔한 나훈아는 1951년(그의 출생년도에 대한 논란은 있다) 부산 동구 초량동에서 2남 2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무역선 선원이었던 아버지 덕에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나훈아는 아버지가 외국에서 사온 축음기로 음악을 접할 수 있었고 이런 영향 때문이었는지 어려서부터 노래를 좋아해 뒷산에서 기타를 켜며 노래를 즐겼다.
나훈아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형을 따라 서울에 올라와 서라벌예술고등학교에 입학했고 재학중이던 고교 1학년 때 오아시스레코드와 계약하여 `천리길'을 발표하면서 공식 데뷔했다.
나훈아는 중후한 목소리의 저음과 귀를 울리는 특유의 고음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특유의 꺾기로 사람들의 마음을 울렸다.
나훈아 하면 빠질 수 없는 사람이 남진이다.
당대를 대표하던 두 가수의 라이벌구도 자체가 화제가 될 정도였다. 화려한 무대로 한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던 남진과는 다르게 나훈아는 차분하고 조용한 음악을 선보였고, 다양한 포즈와 꺾기로 대표되는 트로트 창법은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는 이유로 평가받고있다. 또한 자존심 강한 남성상을 보여줌으로써 많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기도 했다.
삼성전자 이건희 회장의 연회에 초청받았으나 “자신의 공연을 보기 위하여 표를 사는 이들한테만 노래를 한다”고 거절한 일화는 유명하다.
나훈아는 노래실력과 함께 작사·작곡 능력도 훌륭한 싱어송 라이터로 평가받고 있다. 데뷔 이후 현재까지 약 2,500여 곡을 취입하고 정규 앨범 19장을 포함한 200여 개의 앨범을 발표했으며 본인이 직접 작사하거나 작곡한 노래는 약 800여 곡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난 2020년에는 코로나19 여파로 온택트 시대를 맞아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를 KBS 2TV에서 방송했고 이 자리에서 발표한 `테스형'도 큰 인기를 누리는 등 살아있는 가요계 전설로 여전히 활동중이다.
ACCIDENT. 와우아파트 붕괴사고
1970년 4월 8일 새벽 6시 30분 준공된지 4달 만인 마포구 창전동의 아파트가 주저 앉았다.
이 사고로 아파트에서 잠을 자던 주민 가운데 33명이 사망했고 38명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아파트 아래 판잣집에서 잠을 자던 1명도 사망했고판잣집 주민 2명도 부상을 당했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로 불리는 이사고는 당시 서울로 몰려들던 인구의 주거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가 무허가 건물을 줄이고 서민아파트를 건설하겠다는 취지의 건설 계획이었던 아파트 붕괴사고였다.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한국사회의 전시행정, 부정부패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고로 평가받고 있다.
와우아파트는 1969년 6월에 착공해 6개월만인 같은 해 12월에 완공되었고 완공된지 4달 만인 4월에 붕괴되었다. 심지어 서울시가 책정한 건축 비용의 절반도 안 되는 비용으로 건설되었다.
후에 밝혀진 사건경위서에 따르면 와우아파트는 70도 경사의 산비탈을 견디는 기둥을 만드는 데 필요한 철근을 70개에서 5개로 줄였고 시멘트도 거의 섞지 않았다. 1㎡당 280kg밖에 견디지 못하는 건물 기초에 900kg의 하중이 실리기도 했다.
당시 서울시는 1969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시민아파트 2,000개 동을 공급해 9만 가구가 입주할 수 있게 한다는 계획을 세웠고 시민들에게 높은 호응을 얻자 건설 가구 수를 더 늘려 잡았다. 하지만 전체 예산을 늘릴 수는 없었고 건물당 투입되는 건축비는 줄었들었다. 1개 동에 1,200만 원의 비용이 들어가야 했지만 실제 660만 원에 짓기도 했다.
이처럼 와우아파트 붕괴사고는 건설사의 비리와 감독기관의 비리가 서로 결합되어 만들어낸 인재(人災)였다. 너무 빠른 시간에, 충분하지 않은 예산으로, 그리고 건설사의 부실공사와 감독기관 공무원의 부실감사의 합작에 의한 사고였다.
이 사고로 한국 부실공사를 대표하는 사고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 사건으로 서울시장 김현옥, 구청장, 건축 설계자, 현장 감독, 건설사 사장 등이 구속되거나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