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제강점기 한인애국단(192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해 침략의 원흉인 일본군 주요 인물을 처단하기 위해 1931년 김구 선생 주도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결성된 단체)에서 일본군 고위 관료 처단을 위해 군사교육과 의열투쟁을 주도한 안경근·이덕주·최흥식 선생을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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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
[1] 안경근 선생은 안중근 선생의 4촌으로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났으며, 1918년 국내에 가족 모두를 남겨두고 독립운동에 전념하기 위하여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했다.
선생은 1924년 중국 운남성 곤명의 운남강무학교를 졸업, 만주 정의부에 참가하고 황포군관학교 교관으로도 근무하면서 군사 인재를 양성했다. 1931년 한인애국단에서는 윤봉길 의사 의거 이후 일제의 독립유공자 탄압을 피해 김구 선생 신변을 보호했다.
선생은 1926∼27년(황포군관학교 교관), 1934년(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황포군관학교 전신)에 걸쳐 조국 독립을 위해 꼭 필요한 군사 인재를 양성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선생으로부터 교육을 받은 졸업생들은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 창설의 핵심 세력이 되어 무장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에서 군사위원회를 조직(1937년 7월), 선생은 군사위원으로 선임되어 항일운동을 펼쳤다.
[2] 이덕주 선생은 황해도 신천에서 태어나, 20세에 조국 독립을 위해 단신으로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대한교민단 산하 의경대, 상해한인독립운동청년동맹, 상해 한국독립당, 상해 한인청년당에 가입하여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던 중 1932년 3월, ‘조선 총독을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고 황해도 신천에 도착했다. 일본 경찰의 경계가 삼엄해 김구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 김구 선생은 유진식을 국내로 파견했다.
그러나 유진식과 함께 조선 총독 처단 의거 준비를 하던 선생은 평소와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수상히 여긴 신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체포, 취조 중 조선 총독 처단 계획이 발각되면서 의거는 불발됐다.
선생은 1932년 7월 해주지방법원에서 ‘살인예비, 치안유지법, 총포 화약류취체령 위반’으로 징역 7년 형을 선고 받았다.
[3] 최흥식 선생은 서울에서 태어나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각종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다 20세에 귀향, ‘큰 포부와 위대한 뜻을 품고 죽음으로써 3천만 백성을 고통과 압박에서 구해낼 생각’을 갖고 독립운동을 위해 중국 망명을 결심했다.
선생은 상해 도착 후, 윤봉길 의사가 취직했던 종품공사에서 1931년 12월부터 3개월 정도 근무하던 중, 한인애국단 숙소를 사용하면서 한인애국단과 인연이 시작됐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부터 30일까지 리튼(Lytton) 조사단(만주사변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해 국제연맹이 영국의 리튼을 위원장으로 하여 파견한 조사위원회)이 대련에서 현지 조사 일정이 있는 만큼, 국제적인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대련에 있는 관동군 사령관, 남만주철도 총재 등 일제 고위 관료를 처단해야 한다’는 김구 선생의 지령을 받았다.
선생은 1932년 5월 26일 오후 7시 40분, 리튼(Lytton) 조사단 일행이 대련역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확인, 대련으로 나오는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유상근과 함께 처단하기로 했다. 만약 의거가 실패할 경우, 조사단이 대련을 떠나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는 5월 30일 오전 9시 두 번째 의거도 계획했다.
하지만, 선생이 대련의거 준비 과정에서 중국 상해로 보낸 전보를 상하이 주재 일본총영사관에서 의심하여 수취인(곽윤:김구 선생이 편지 등을 통해 주요 정보를 주고받을 때 사용하는 이름)을 확인한 뒤, 관동청에 발신인 체포를 요청하면서 거사일 이틀 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 의거를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선생은 대련법원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 받고, 여순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들 세 분의 선생은 한인애국단 소속으로 특수정보를 수집하여 의열투쟁을 지원했고, 본인의 안위보다는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초개(草芥)같이 버리신 분들이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안경근 선생에게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이덕주 선생은 1990년, 최흥식 선생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각각 추서했다.
[방병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