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CAR. 포니 현대자동차의 첫 독자생산 모델인 포니는 1975년 12월 생산을 시작했다. 1985년까지 생산된 포니는 현대자동차가 1973년부터 독자 모델 개발을 시작해 1974년 10월 이탈리아 토리노모터쇼에서 콘셉트카로 최초 공개했다. 이후 1975년 12월부터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대량생산을 시작해 1976년 2월 시판에 들어갔다. 후륜구동인 포니는 현대차가 그동안 미국 포드사로부터 라이센스를 얻어 생산하던 것에서 벗어나 일본의 미쓰비시로부터 기술제휴를 받은 독자 모델이었다. 포니는 대한민국 최초인 4도어 패스트백 세단(4도어 모델)/해치백(3도어 모델), 대한민국에서 유일했던 후륜구동 3/5도어 해치백(3도어 모델과 1982년 페이스리프트된 포니2 5도어 모델)을 채택했다. 포니의 개발로 우리나라는 일본에 이어 아시아 국가 중 두 번째로 자체 개발 자동차를 보유하게 되었고 세계에서는 16번째로 고유모델 자동차를 만든 국가가 되었다. 또한 포니는 외국에 수출된 최초의 국산 승용차이기도 하다. 그만큼이나 대중들의 큰 사랑을 받았다. 출시 당시 가격은 2,289,200원 선이였으며 10,726대가 판매되어 43.5%의 점유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보고 싶어요 포니 포니, 갖고 싶어요 포니 포니”라는 CM송도 인기를 끌었는데 이 CM송을 통해 포니를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포니는 서민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자동차로 한국인의 취향과 체격 그리고 도로 사정에 맞는 경제형 차인 데다가 내구성이 좋아 국민들의 인기를 끌면서 마이카 시대를 열어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포니는 1982년 2월까지 모두 297,903대가 생산되었고 1982년 2월 19일에 포니Ⅱ로 디자인을 변경했다. 포니는 한국의 자동차 산업의 기술발전과 자립에 있어 큰 발자취를 남긴 자동차로 평가받고 있으며 지난 2009년 6월에는 국립민속박물관에서 포니1 픽업을 소장하게 되었다고 밝혔고, 2012년 1월에는 울산박물관에서 포니를 구입해 영구 전시한다고 밝혔다. STAR. 월드스타 강수연 지난달 7일 가슴 아픈 비보가 날아들었다. 월드스타 강수연이 55세라는 나이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강수연은 네 살 때 아역 배우로 연기를 시작해 대한민국 최초의 월드스타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워낙 어린 나이에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그녀의 연기생활이 무척이나 긴 것처럼 느껴지지만 그녀는 55세라는 충분히 활동할 수 있는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난 것이다. 지난 1966년 서울 종로에서 태어난 강수연은 4살 때인 1969년 TBC(동양방송)전속 아역배우로 연기를 시작했다. 이후 `별3형제', `비둘기의 합창', `슬픔은 이제 그만' 등을 통해 아역배우로 자리매김했다. 이후에는 `고교생 일기'를 통해 대중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고, 하이틴 스타로 급부상했다. 성인이 된 이후에는 `고래사냥2'로 성인 배우로서 시작을 알렸으며 1987년 개봉된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로 그녀의 연기인생은 만개하기 시작했다. 이후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 등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씨받이'로 베니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989년 `아제 아제 바라아제'를 통해 모스크바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함으로써 `월드스타'로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이 영화에서 그녀의 삭발투혼 연기는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이후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 `경마장 가는 길', `그대 안의 블루' 등으로 흥행을 보증하는 스타로 거듭났다. 스크린을 넘어 TV브라운관에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2001년 SBS 드라마 `여인천하'에서 주인공 정난정 역으로 출연해 연기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한국영화를 위해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지난해 영화 부산행의 감독 연상호 씨의 `정이'의 출연 소식을 전하면서 오랜만에 복귀를 알렸지만 결국 `정이'는 그녀의 유작이 되었다. 한편 그녀의 부고가 전해지자 영화계는 물론 전 국민적으로 그녀의 사망에 애도를 표하며 그녀의 죽음을 안타까워 했다. ACCIDENT. 이리역 폭발 사고 1977년 11월 11일 오후 9시 15분 전북 익산 이리역(현 전라북도 익산시)에서 열차가 폭발했다. 인천을 출발하여 광주로 가던 한국화약(현 한화의 전신)의 열차가 다이너마이트용 화약과 뇌관, 초안폭양 등 모두 30여 톤에 이르는 고성능 폭발물을 싣고 이리역 구내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폭발했다. 이 사고로 59명이 사망하고 1,34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1,674세대 7,800여 명의 이재민이 발생했다. 사고의 원인은 역 구내에서 대기하고 있던 화약 호송원이 술을 마시고 종이로 된 화약상자 위에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고, 이 촛불이 화약상자에 옮겨붙어 폭발했다. 화약류 등의 위험물의 경우 역 내에 대기시키지 않고 곧바로 통과시키는 것이 원칙이나 이를 무시하고 수송을 늦추고 있는 이리역 측에 항의를 제기하던 한국화약주식회사의 호송원 신무일 씨가 항의가 묵살되자 이리역 앞 식당에서 음주를 한 후 화약열차로 들어가 어두운 열차를 밝히고자 양초에 불을 붙였고, 잠시 잠이 든 사이에 초의 불이 화약상자로 옮겨 붙어버렸다. 이 열차에는 다이너마이트 상자 914개(22톤), 초산암모니아 상자 200개(5톤), 초안(硝安) 폭약 상자 100개(2톤), 뇌관상자 36개(1톤), 합계 1,250상자 30톤이 실려 있었다. 이 사고로 인해 이리역 구내에는 깊이 15m, 직경 30m의 큰 웅덩이가 패였고 역 구내에 있던 객차·화물열차·기관차 등 30여 량 남짓이 파손되었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버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또한 이리역사를 비롯하여 구내 객화차 사무소, 보선 사무소 등 건물이 심각한 균열 또는 붕괴의 피해를 입었고, 총 23억여 원의 재산 피해를 남겼다. 한편 이 사건으로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스타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인기스타였던 하춘화 씨가 이리역 근처에서 공연 중이었는데 이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이 쇼의 사회자였던 이주일 씨는 부상을 당한 하춘화 씨를 목숨을 건 필사의 노력으로 구출했고, 이 사건을 계기로 이름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