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시절]
격동의 시절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1960∼70년대 그 가난하던 시절. 박정희 정부는 실업문제를 해소하고 외화벌이를 위해 독일과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으로 대한민국은 광부와 간호사를 독일로 보내게 된다.
지난 2008년 과거사정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1963년부터 1977년까지 광부 7,936명, 간호요원 11,057명 및 기능공 931명 등 총 1만 9천여 명이 독일로 떠났었다. 당시 광부의 월급은 600마르크(160달러)로 높은 수익이 보장되었기 때문에 독일로 가고자 하는 노동자 수도 굉장히 많았다. 1963년의 경우 500명 모집에 4만 6,000여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간호사의 경우는 정부가 파견을 시작한 1963년 이전부터 민간에서 파견을 하고 있었다. 독일(서독)은 급성장으로 인해 간호 인력이 부족하자 마인츠 대학교 병원에 근무하고 있던 이수길 박사를 통해 간호사 모집을 하고 있었다.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근무환경은 매우 열악했다. 지하 1,000미터가 넘는 석탄광산 막장에서 중노동에 시달렸고, 간호사도 대변치우기, 식사수발 등의 업무를 시행하며 지냈다. 업무 강도가 높은 만큼 사상자도 많았는데 `파독 광부 30년사'에 따르면, 1963년에서 1979년까지 독일에서 광부 65명, 간호사 44명, 기능공 8명이 사망했는데, 그중 작업 중에 사망한 광부가 27명, 자살한 광부가 4명, 자살한 간호사가 19명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가난한 나라에 큰 도움이 돠었다. 이들이 매달 송금한 돈은 국가재정에 큰 역할을 했다.
파독 간호사들이 매년 국내로 송금한 1천만 마르크 이상의 외화는 한국 경제개발에 커다란 기여를 했다. 따라서 최근 이들의 국가발전에 대한 공헌에 대해 정부차원에서의 역사적 재평가 작업이 추진되고 있다.
홍익대학교 사범대학 역사교육과 정해본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1967년 당시 서독 파견 간호사들이 보내온 송금액은 한국 상품수출액의 35.9%, 무역 외 수입의 30.6%를 차지했다”면서, “이들이야말로 한국민들이 보릿고개를 넘길 수 있게 도운 일등공신이었다”고 말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수 올리비아 뉴튼존이 지난달 8일 미국 리포니아주 남부 자택에서 암 투병 중 향년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올리비아 뉴튼존은 1948년 9월 26일 영국 케임브리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물리학자인 부모 밑에서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올리비아는 아버지가 오르몬드 카리치대학의 학장으로 취임하자 호주로 이주해 유소년기를 보냈고 1965년 TV 노래 경연 대회에서 우승하면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1966년 영국에서 첫 싱글 앨범을 발표했고 1971년 밥 딜런이 만든 〈If Not for You〉를 비롯한 〈Let Me Be There〉, 〈Physical〉 등이 히트하면서 우리나라에서도 큰 사랑을 받았다.
또한 1974년 발표한 〈I Honestly Love You〉가 그래미상을 수상했고, 1981년에 발매한 〈Physical〉은 빌보드 싱글 차트 핫 100에서 10주 연속 1위를 차지하는 등 인지도를 쌓아갔다. 그녀는 배우로서도 주목을 받았는데 1978년 뮤지컬 영화 `그리스'에서 샌디 올슨 역을 맡아 글로벌 스타로 자리매김했다.
그녀는 Summer Nights와 You're The One That I Want(1978), Magic(1980), Xanadu(1980) 등의 OST를 부르기도 했다.
미모 또한 빼어났고 동안으로도 유명했다. 그리스 출연 당시 그녀가 맡은 샌디는 여고생이었지만 그녀의 나이는 30세였다.
안타깝게도 그녀는 전성기에 발병한 유방암으로 인해 힘든시간을 보냈고, 유방암 조기 진단 및 치료를 후원하는 캠페인에 앞장섰으며, 2008년에는 호주 멜버른에 자신의 이름을 내건 `올리비아 뉴튼 존 암 센터(ONJ Cancer Center)'를 설립해 암 연구를 꾸준히 지원했다.
또한 환경 및 동물 권리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오랜기간 활동가로 활약하기도 했다. 이를 인정받아 2020년 신년서훈명단에 대영제국 훈장 2등급(DBE) 수훈자로 올라, 경칭 `Dame'이 붙기도 했다.
하지만 오랜 투병끝에 그녀는 지난달 8일 유방암으로 끝내 생을 마감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지난 1975년부터 87년까지 부랑자를 선도한다는 목적으로 장애인, 고아 등을 불범 감금하고 강제노역 등을 시키며 인권을 유린한 사건이다.
부산에 위치한 형제복지원에는 당시 약 3,000명을 수용한 전국에서 가장 큰 시설이었다.
거리 등에 있는 무연고자들이나 장애인, 고아 심지어 가족이 있는 일반 시민 어린이들까지 끌고가 불범 감금을 하고 폭력, 성폭행 등의 학대를 가했고 이런 상황에서 사망한 사람들은 암매장을 하는 등 끔찍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형제복지원이 운영되는 동안 확인된 사망자가 500명이 넘는다.
이 사건이 알려진 건 1987년 3월 22일 35명이 탈출해 폭로하면서다. 사건이 알려지자 당국은 망원 렌즈를 이용해 현장을 촬영하고 2개월간 내사를 펼쳐 관계자들을 검거했다.
검찰은 1987년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을 수사해 불법 감금 혐의 등으로 재판에 넘겼지만 대법원은 1989년 7월 정부훈령에 따른 부랑자 수용이었다며 무죄를 선고했으며, 박 원장은 건축법 위반과 업무상 횡령 혐의만 인정돼 징역 2년 6개월형의 솜방망이 처벌을 받았다. 오히려 박 원장은 전두환 정권으로부터 `부랑아 퇴치 공로'를 인정받아 1981년과 1984년 각각 국민포장과 국민훈장 동백장을 받았고, 박 원장에 대한 훈포장은 2018년 7월에야 박탈된 바 있다.
이 사건은 정부의 묵인과 외면 속에 철저히 은폐되기도 했다. 1982년 형제복지원 강제수용 피해자 가족이 정부와 수사기관에 수사를 촉구했지만, 오히려 진정인이 무고죄로 고소를 당하고 실형을 선고받았고, 1986년 보안사령부는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간첩 용의자를 감시하기 위해 보안사 요원을 수용자로 위장 침투시켜 복지원 실상을 알아냈지만 어떤 조처도 하지 않았다.
최근들어 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형제복지원 사건을 국가의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이라고 결론내렸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지 35년 만에 국가 기관이 처음으로 `국가 폭력에 따른 인권침해 사건'으로 인정한 것이다.
진실화해위는 24일 오전 위원회 대회의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전날 진실규명 결정한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위원회는 "이 사건은 경찰 등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거나 이들의 허가와 지원, 묵인하에 부랑인으로 지목한 불특정 민간인을 적법절차 없이 단속해 형제복지원에 장기간 자의적으로 구금한 상태에서 강제노동, 가혹행위, 성폭력, 사망, 실종 등 총체적인 인권침해가 발생한 사건"이라고 밝혔다.
이번 조사에서 위원회는 ▲ 부랑인 단속 규정의 위헌·위법성 ▲ 형제복지원 수용과정의 위법성 및 운영과정의 심각한 인권침해 ▲ 정부의 형제복지원 사건 인지 및 조직적 축소·은폐 시도 등을 밝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