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0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ACCIDENT. 예수의 재림? 시한부 종말론 휴거
1990년대가 시작되자 새로운 천년을 앞두고 많은 사건들이 일어났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건이 다미선교회가 일으킨 시한부 종말론 사건이다.
이 사건은 기독서적출판사 생명의말씀사에서 번역가로 활동하던 이장림 목사가 만든 다미선교회(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가 세계 종말의 날인 1992년 10월 28일 이장림 목사 밑에서 성경을 배운 자들은 예수의 재림과 함께 하늘로 들려 올려진다는 휴거를 주장했다.
이 종말론에 빠져 수 개월간 행방불명되거나 집단생활을 위해 회사를 휴직하거나 학교를 그만두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교사, 공무원, 대기업 간부, 심지어 초등학생까지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빠져들었고, 전 재산을 가져다 바치는 일들이 일어났다. 당시 이 사건은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에서도 파란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이들이 휴거일이라 주장한 1992년 10월 28일에는 이를 취재하기 위해 국내외 많은 취재진들이 휴거가 일어난다는 장소에 모여들었고,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경찰이 출동하기도 했다. 다미선교회와 종말론을 추종하던 교회들의 신도들이 일명 `승천복'이라는 흰색 옷을 입고 찬송가를 부르며 종말을 기다리는 장면이 그대로 언론에 중개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자정이 지나도록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휴거설의 장본인인 이장림 목사는 신도들의 재산 34억여 원을 헌납받아 가로챈 혐의로 구속되었고, 그해 12월 징역 2년을 선고받고 구속되었다.
1967년 미국에서 활동 하던 가수 윤복희가 귀국길에 입은 짧은 미니스커트는 많은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 이후 미니스커트는 젊은 여성들의 상징과 같은 문화로 자리 잡아갔다. 여성들에게 미니스커트가 있었다면 남성들에게는 장발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재건복, 간소복 등으로 국민들의 옷을 통제하려 했었던 박정희 정권은 이런 차림새를 두고 보고 있지 않았다. 미풍양속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장발과 미니스커트를 단속했다,
치마가 짧은 여성들의 무릎에서 치마 끝까지의 길이를 재고, 가위를 들고 다니며 머리가 긴 장발의 남성들을 단속했다. 1974년 6월 일주일 동안 1만 103명을 단속하기도 했다. 이들 가운데 9,841명은 머리를 가위로 깎은 후 풀어주고, 거부한 262명을 즉결심판에 넘기기도 했다.
1976년 5월 정부는 `국민의 주체의식을 확립하여 건전한 사회기풍을 정착화한다'는 이유로 장발 단속 계획을 수립하여 ‘히피성 장발’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였지만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자 공무원 뿐 아니라 ‘학교, 단체, 기업체, 공장 등 전 조직을 통하여 조직적이고 자율적인 지도단속’을 추진하고자 했다.
하지만 젊은이들의 머리 모양과 복장을 법으로 통제하려는 정부의 조치는 반발이 심했고 1980년 내무부는 ‘장발 단속이 청소년들의 자율정신을 저해하는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단속중지를 지시했다. 그리고 1988년에 「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하면서 `남·녀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긴 머리를 함으로써 좋은 풍속을 해친 남자 또는 점잖지 못한 옷차림을 하거나 장식물을 달고 다님으로써 좋은 풍속을 해친 사람'을 경범죄의 종류에서 뺌으로써 장발이나 미니스커트에 대한 단속 관련 규정도 삭제되었다.
경부고속도로는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한국 고도 경제 성장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꼽힌다.
박정희 대통령의 대선공약으로 시작된 이 거대한 프로젝트는 많은 논란 속에 1968년 2월 1일 착공됐다. 당시 야당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보다 서울∼강원 간 고속도로가 더 시급하다고 주장했지만 박 대통령은 경부선 철로가 있는 곳에 고속도로 건설을 발표했고 1970년 7월 7일 완공됐다. 서울∼인천을 잇는 경인고속도로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건설된 것이다.
당시 서울과 부산을 오가는 가장 빠른 방법인 철도를 이용해도 12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경부고속도로 건설로 5시간 내로 달릴 수 있게 하겠다는 포부로 건설되었다. 사업비는 429억 원이 투입됐다.
더욱 놀라운 건 경부고속도로는 2년 5개월 만에 완공되었다는 점이다. 이 건설을 위해 16개 업체를 비롯해 3개 건설공병단까지 참여해 마치 군사작전처럼 진행된 사업이었고 연인원 892만 8,000명과 165만 대의 장비가 투입됐다. 건설 중 77명이 사망하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축사를 통해 “순전히 우리 기술로 다른 나라에서 만든 고속도로에 비하면 훨씬 싼 값에 가장 빨리 완공하였다는 점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큰 공사를 2년 5개월 만에 마침으로써 부실 논란이 끊이지 않았고, 실제로 개통 10년간 유지보수비용이 건설비용보다 높을 정도로 부실한 부분이 많았다. 당초 계획한 24m의 노폭을 22.4m로 줄였고 비용과 기간을 줄이기 위해 중앙분리대를 비롯한 안전시설을 갖추지 못해 차후 대형사고의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또한 개통 1년 만에는 전 노선에 대한 덧씌우기 공사가 착수되기도 했다.
하지만 경부고속도로의 건설로 우리나라의 대동맥이 뚫림으로써 경제에 큰 활력을 불어 넣을 수 있었고, 한강의 기적의 초석을 놓은 위대한 건설로 여전히 손꼽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