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기념관에서는 2023년 2월의 독립운동가로 문학, 군사, 의학 등의 분야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송몽규, 안창남, 김필순 세 분의 애국지사를 선정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바쳐 조국에 자주독립의 의지를 각인시켜 주신 분들의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가고자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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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국가보훈처〉 |
▲ 송몽규
함북 경흥(慶興) 사람이다.
만주 간도성 연길현 지신촌 명동둔에서 출생하여 1935년 4월 만주에 있는 은진중학교로부터 민족의식을 계몽 받고 중국 남경으로 건너가 김구가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특설한 한인특별반에 입학하여 군사훈련교육을 받는 한편, 「신민(新民)」 발행에 관여하였다.
그 후 1935년 11월 중국 제남지구 독립운동가 이웅 일파에게 투신하여 활동하다가 1936년 3월 제남영사관 경찰부에 붙잡혀 강제귀국당한 뒤 동년 6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과 살인 등의 혐의로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에 구금되어 취조를 받은 뒤 8월 말경 석방되었다.
그 후 다시 만주로 건너간 그는 간도성에 소재한 국민고등학교를 졸업하였으며, 1938년 4월 외사촌 동생인 윤동주와 함께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였다. 그는 일제의 민족동화정책은 한국어를 폐지하고 일본어를 사용하게 함으로써 한국 고유의 문화와 한민족을 말살시키는 데 있으므로 민족문화의 유지와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에 따라 1939년 2월 동급생 윤동주·백인준·강처중 등과 한국문학 동인잡지의 간행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문학작품 품평회 등을 통해 민족의식 앙양 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2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그는 4월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하여 세계사와 문학 연구 등을 통한 민족문화 유지에 노력하였다.
동년 10월경부터 1943년 7월까지 동지사대학의 윤동주와 제3고등학교생 고희욱 등과 더불어 경도 시내에서 자주 모임을 갖고 민족정신을 작흥시킬 수 있는 학문적 연구에 힘쓰다가 1943년 7월 14일 일경에 붙잡혀 1944년 4월 13일 경도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고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45년 3월 7일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안창남
1918년 일본 오사카(大阪) 자동차학교를 졸업하고 적우비행기제작소에서 비행기 제조법을 익혔으며 소율 비행학교에 입학하여 조종술을 배웠다. 1921년 12월 일시 귀국하여 금강호를 타고 조선 상공을 비행하면서부터 자전거의 엄복동과 함께 천재 비행사로 명성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비행교원으로 활동하다가 1923년 9월 관동대지진을 겪은 후 국내로 돌아와 1924년 말경 중국 안동현 이륭양행의 도움으로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5년 남방혁명군의 곽송령의 초빙으로 곽송령 휘하의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어 전투에 참전하여 전과를 세우는 등 중국혁명을 통한 민족해방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당시 북경의 풍옥상 군벌로 인해 남방혁명군의 북진이 수포로 돌아가자, 고국으로 돌아왔다.
국내에서 이상재와 교분을 쌓은 그는 김동철과 함께 재차 중국으로 건너간 후 북평에서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으며, 1926년에는 여운형의 소개로 산서성의 군벌 염석산 군대에 참가하여 항공중장과 산서비행학교 교장으로 사망 시까지 비행사를 양성하였다.
1928년 음력 9월 중국 산서성 태원부를 근거로 최양옥·신덕영·김정련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는 한편, 이듬해인 1929년 비행학교 설립과 군자금 확보를 위해 최양옥과 김정련 등에게 600여 원을 제공하면서 이들을 국내로 잠입시켰으나 실패하고, 산서비행학교에서 비행사 양성을 위해 비행교육 중 1930년 4월 2일 추락하여 순국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김필순
황해도 장연(長淵) 사람이다.
1908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였다. 재학 중 구국운동가로 활동하였다. 도산 안창호와 결의형제를 맺고 1907년 신민회가 조직될 때, 그 회원이 되었다.
1910년을 전후하여 해외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독립운동가들 사이에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에 따라 전 국민은 무장세력의 양성과 군비를 갖추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기다려야 한다는 전제 아래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게 되었다. 김필순은 1911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이동녕·전병현 등과 함께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기지 개척에 힘썼다.
그 후 내몽고 치치하얼에 수십만 평의 토지를 매입하고 이곳에 100여 호의 한인들을 이주시켜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운동의 후방 기지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그는 의료업을 하면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던 중, 1919년 9월 1일 일본인 조수가 주는 우유를 먹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방병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