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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
▲ 이희경
평안남도 순천 사람이다.
1904년 미국으로 건너가서 의학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1915년 하와이에서 병원을 개설하여 애국동지들을 원조하며 광복운동을 계획하였다.
1918년 1월에 귀국하여 그해 12월에 상해로 망명하였다. 1919년 5월 13일에 제4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평안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같은 해 7월에는 내무부의 인가를 받아 대한적십자회를 발족시켰으며, 8월 20일에 거류민단사무소에서 적십자 상의회를 개최한 뒤 초대 회장에 선임되었다.
1920년 7월에 제5회 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군무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다. 1919년 1차 대전이 끝난 후, 극동문제를 시찰하기 위해, 미국 의회에서 극동지역시찰단이 관광단이란 명목으로 조직되어 1920년 여름 중국과 한국의 여러 곳을 돌아보게 되었을 때 임시정부에서는 시찰단을 최대로 환영하면서 일본의 부당한 지배로 감옥에 갇혀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애국자나 기독교도라는 점을 파악게 하여 한국 독립운동에 유리한 입장을 가지고 돌아가게 하도록 하였다.
그는 정인과·여운형·여운홍·이유필·서병호·김순애·황진남·신국권·임춘희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임되어 8월 5일 상해시찰단이 상륙하여 중국에 머무는 동안 진정서를 전달하는 등 적극적인 외교 공세를 벌였다.
1921년 5월 7일에는 임시정부 외무차장 겸 외무총장 대리로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그는 또한 1921년 4월에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안병찬·장건상·왕삼덕 등과 독립운동자금 확보 및 외교활동을 벌이고 북경을 거쳐 상해로 돌아왔다.
1935년 10월 20일에는 미국제약회사의 동양특파원을 가장하고 귀국하던 중, 일본에서 체포되어 국내에 압송되었다. 그는 압송 도중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병으로 신음하다가 1941년 6월에 서울에서 별세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인정하여 1968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나용균
전라북도 정읍 사람이다.
1918년경 일본 동경에 유학 중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발표와 제1차 세계대전 종결로 인한 약소국의 독립 분위기에 따라 동지 백관수, 김도연 등 7명과 같이 적지에서라도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일으키자고 비밀회합을 하면서 구체적으로 실현시키기 위하여 일본 동경에서 한국인으로 유학하는 남녀학생 청년 등을 규합하고 독립선언문을 낭독, 대대적인 독립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할 구체적인 계획을 세웠다.
마침내 1919년 2월 8일 적지에서 2·8독립선언을 실현케 하였다. 그는 2·8독립선언을 위한 재정 책임의 사업을 분담하였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하여 송진우, 김성수, 최린 등을 차례로 방문하고 협조를 당부하였다.
그는 2·8독립선언이 있은 뒤 주모자가 체포되고 막후 연루자도 미행을 당하는 등 신변에 위협을 느끼자 그해 4월경 상해로 망명하였다.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임되었고 법제위원과 정부조사 특별위원 및 정치분과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입법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였다.
1922년 1월 소련의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회의에 이동휘, 여운형, 김규식 등과 한국 대표로 참석하여 독립을 호소하였으며, 동년 5월 10일에는 국민대표회의 주비위원에 선임되어 국민의 대결속과 독립운동을 위한 대동단결에 기여하였다.
광복 후에는 제헌국회의원, 보사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인정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황기환
평안남도 순천 사람이다.
미국에 유학 가서 공부하던 중, 미국이 세계 제1차대전에 참전함에 따라 자원입대하여 제1차대전에 출전하였다. 그 후 1919년 6월 프랑스로 귀환한 그는 이승만이 설립한 구미주차한국위원회의 원동지역 대표 김규식이 프랑스 베르사유에서 개최되는 평화회의에 참석하고자 파리로 오자, 김복 등과 함께 대표단의 사무를 협조하는 동시에 김규식의 서기장으로 활약하면서 한국의 독립 선전활동에 종사하였다.
1920년 1월 프랑스 파리에 주재하는 한국선전단 선전국장으로 불문 잡지를 창간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 여러 나라에 호소하는 한편, 파리대학 교수인 우락을 초청하여 인권옹호회를 조직하고 지리학회장에서 「원동(遠東) 한·중(韓中) 화평(和平)이 수(受)하는 압박(壓迫)」이란 문제로 강연회를 개최하는 등 언론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였다. 동년 10월 영국 런던에서 멕켄시와 윌리암스가 발기하여 한국친구회를 조직하자, 참석하여 활동하였다.
1921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무부 주차영국런던위원으로 임명된 그는 『영일동맹과 한국』이란 서적을 편집하여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된 것이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 분할정책에서 비롯된 것임을 비판하였다. 또한 동년 5월 파리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통신부 사업의 일환으로 한국친우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외교사업을 후원하는 한편, 동년 7월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부 런던주재 외교위원 및 구미위원부에서 활약하다가 1923년 미국 뉴욕에서 심장병으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방병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