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보훈처(처장 박민식)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일본인으로 대한민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대한민국을 사랑한 독립유공자, 가네코 후미코·후세 다쓰지 선생을 ‘2023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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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제공:국가보훈처〉 |
▲ 가네코 후미코
일본 요코하마 출생(1903년)인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흑도회(黑濤會,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조직한 사회주의, 무정부주의운동 단체)에서 한국의 독립을 위해 의열 활동을 한 박열(1989년 대통령장)의 배우자다. 박열과 함께 흑도회 기관지인 ‘흑도(黑濤)’를 창간하고 노동자 후원과 친일파를 응징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1923년 9월 1일 도쿄 일대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선생은 일제의 요주의 인물인 박열과 함께 보호검속(공공의 안전을 해롭게 하거나 죄를 지을 염려가 있는 사람을 경찰에 잠시 가둠)이란 명목으로 연행 및 수감됐다.
조사 과정에서 박열의 폭탄구입 계획이 드러나자 검찰은 두 사람에게 ‘대역사건(大逆事件, 천황 또는 국가의 전복을 기도하며 벌이는 대규모 반역사건)’ 혐의를 씌워 폭발물 취체법 위반으로 기소했다.
재판 과정에서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일본 정부에 목숨을 구걸하기보다는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투쟁을 벌였다. 1926년 2월 26일 도쿄 대심원 법정 공판에서 한복 치마저고리를 입고 이름은 ‘박문자’라고 밝힌 선생은, 의연한 태도로 박열과 함께 사형 선고를 요구했으며 사형 판결 즉시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일본 검찰은 10일 만에 두 사람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시키는 은사(恩赦, 사면)를 재판부에 신청했고, 곧 사면장이 발행되었으나 선생은 일본 정부의 기만 술책에 저항하며 사면장을 형무소장 앞에서 찢어버렸다.
그러던 중 1926년 7월 23일 옥중에서 가네코 후미코 선생은 의문의 죽음을 맞았다. 교도소 측은 선생의 시신을 서둘러 인근 들판에 가매장했고 흑우회(黑友會, 일본에서 한국인들이 조직한 무정부주의운동 단체) 동지들이 유해를 수습해 변호사인 후세 다쓰지 선생에게 맡겼으며 후세 다쓰지 선생은 훗날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유해를 운구해 팔령산에 묻었다.
정부는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18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후세 다쓰지
1879년 일본 오사카군 출생의 변호사인 후세 다쓰지 선생은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최팔용, 백관수 등 9명에 대해 ‘출판법 위반사건’에서 변호를 맡으며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옹호했다.
1923년 8월, 한국을 방문해 ‘인간생활의 개조운동과 조선 민족의 사명’이란 주제의 강연회를 가진 선생은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아 일어난 관동대지진으로 대규모 한국인 학살이 발생하자 사건을 조사해 학살 책임이 일본 정부에 있음을 밝히려 했으나 일본 당국의 방해로 조사 결과를 발표할 수 없었다.
선생은 일본 정부로부터 ‘대역 사범’으로 법정투쟁을 벌이는 가네코 후미코 선생과 박열의 변론을 맡았다. 일본 천황제를 부정하고 식민 통치를 철저히 비판하는 ‘일본 재판 역사상 유례가 없는’ 사건의 두 주인공에 대한 목숨을 건 변호였다.
또한, 변론 과정에서 옥사한 가네코 후미코 선생의 유해를 흑우회 동지들로부터 거두어 훗날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으로 운구해 묻히게 했다.
이후 조선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독립운동가들을 지속적으로 변호한 선생은 1932년 법정 모독으로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고 1933년에는 신문지법, 우편법 위반으로 금고 3개월의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일제 패망 후 다시 변호사로 활동한 선생은 새로운 평화헌법 보급과 재일조선인의 권리를 보호하는 투쟁에 매진하다 1953년 서거했다. 장례식에는 수많은 한국인들이 장의위원으로 참여해 선생의 명복을 빌었다.
정부는 후세 다쓰지 선생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2004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방병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