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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 국가보훈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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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덕홍
전남 나주 사람이다.
1907년 일제는 정미7조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 해산하였다. 이와 같이 국망(國亡)의 조짐이 심화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여 국권 회복을 위해 일제와 항쟁하였다.
당시의 의병봉기는 같은 해 8월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진에 가담함으로써 전국적인 항쟁으로 발전하였고 투쟁방식도 일제와의 직접적인 전투뿐 아니라 군자금 모집, 친일관료 응징 등으로 표현되었다.
이와 같은 시기에 거의한 오덕홍은 전투에 편리한 소규모 유격부대로 의진을 편성하여 일본군을 기습하는 등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 9월 나주군 아계면(芽界面) 일동(日洞)에서 일군에 붙잡혀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김일언
김일언은 1907년 4월 의병장 정용기가 다시 일어나 산남의진(山南義陣)을 결성하자 참여하여 우포장(右砲將)에 선임되었으며, 산남의진의 3대 의병장 정환직과 최세윤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은 1906년 4월 경북 영천에서 창의한 의병부대이다. 창의장 정용기가 1906년 4월 28일 경주 우각리(牛覺里)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산남의진은 일시 활동을 중단하였다. 1907년 4월 재기한 정용기는 산남의진을 다시 결성하고 서울진공작전에 참가하기 위해 북상을 준비하던 중 1907년 10월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전사하였다.
그 뒤 동년 12월 제2대 대장 정환직마저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순국하였다. 산남의진 결성 초부터 흥해에 머물며 후방에서 지원하고 있던 최세윤은 1908년 2월 5일 이세기, 정순기 등의 추대로 산남의진의 제3대 대장이 되었다.
최세윤은 경북 흥해 출신으로 1894년 동학농민항쟁에 참여하여 부하 300명을 거느린 소모장(召募將)으로 활약한 바 있고, 1896년 안동의진의 제2대 대장 김도화의 아장(亞將)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최세윤은 1908년 1월부터 일본군에게 체포된 7월까지 일본군의 끈질긴 토벌작전에도 불구하고 영천을 비롯하여 청송, 영덕, 영양, 영해, 경주, 청도, 의성 등지에서 각 지대별 유격전을 구사하여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김일언은 경북 경주 출신이라 하나 확실치 않다. 1907년 4월 정용기가 다시 일어나 산남의진을 다시 결성하자 이에 참여하여 우포장(右砲將)에 선임되었다. 산남의진의 의병장 최세윤의 휘하에서 도포장(都砲將)으로 활동하였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정래의
경북 영일 사람이다.
1906, 7년경 경북 흥해·영해·청하군 등지에서 산남의진 우익장·좌익장·참모장으로 활동하고, 1926년 3월 산남의진 생존자 모임인 참동계를 조직하였다가 체포되어 기소중지 처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방병건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