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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가보훈부] |
▲ 이재현
경기도 시흥 사람이다.
1939년 10월 중경에서 혈기 왕성한 청년들이 자발적으로 공작대를 조직하여 전지에 나가 대일항전을 전개하였는데, 이 공작대가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이다.
그는 동대의 공작조장으로 임명되어 30여 명의 대원과 함께 활동하였다.
동년 겨울 서안으로 이주하였으며, 그는 김동수(金東洙)·김천성(金天成) 등 대원 8명과 함께 일선지구인 산서성 등지로 파견되어 중국 호종남(胡宗南) 직속의 산서지구(山西地區) 유격대와 합류, 정보 수집, 적정 탐색, 초모 공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산서성(山西省) 장치현(長治縣) 소동구(小東口)를 본거지로 하여 노안성(潞安省) 및 하남성의 초작 등지로 진출하여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됨에 따라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하게 되었다. 따라서 나월환(羅月煥)은 지대장으로 임명되었으며 그는 이하유(李何有)·박기성(朴基成)·김동수(金東洙) 등과 함께 간부로 임명되었다. 제5지대는 서안에 본부를 두고 총사령부를 호위하면서 장병들을 훈련하는 임무에 종사하는 동시에 하남성, 하북성 등지로 나가 초모·선전·정보활동을 전개하였다.
1942년 광복군의 재편성에 따라 제5지대는 광복군 제2지대로 편입되었다. 1944년 4월에는 한미합작훈련인 OSS훈련 무전반에서 교관을 맡았으며 1945년 국내 정진군의 본부요원이 되어 국내 침투공작 활동을 위하여 대기하던 중, 광복을 맞이하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 한형석
부산 동래 사람이다.
일찍이 부친 한흥교(韓興敎)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신예(新藝)예술대학에서 수학하였다.
1939년 10월에 중경(重慶)에서 한국청년전지공작대가 결성되자 그는 예술조장으로 임명되어 군가인 ‘한국행진곡’, ‘항전가곡(抗戰歌曲)’을 작곡하였으며, 서안 등지에서 ‘국경의 밤’, ‘아리랑’ 등을 공연하여 군민을 위안하고 항일의식을 고취시켰다.
1940년에는 중국 중앙전시간부훈련 제4단 특과총대학원대 한청반(中央戰時幹部訓練 第四團 特科總大學員隊韓靑班)에서 교관을 역임하였다. 1941년 1월 한국청년전지공작대는 광복군 제5지대로 편입되었으며, 그는 광복군가집 1, 2집을 발간하고 국기가(國旗歌), 광복군 제2지대가, 압록강행진곡, 조국행진곡 등 항일가곡을 작곡하였다.
1944년 10월 그는 광복군 제2지대 선전대장에 선임되어 복무하면서 작곡 및 가극 활동으로 침체된 항일정신을 고취하고 광복군과 중국군 연합전선을 한층 견고히 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하였다.
▲ 송면수
강원도 회양(淮陽) 사람이다.
1930년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중국 상해로 망명한 후 1937년 7월 1일 중국 광동에 있는 국립중산대학 법학원 경제학과를 졸업하였다.
1938년 나월환·안춘생 등 200여 명과 함께 한국청년전지공작대를 조편하여 한구·무창·대전·장사 전투에 참전하였으며, 1940년 임시정부가 중경으로 이동하자 후방공작을 담당하면서 항일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또한 장사 마원령에서 40여 명의 한국 청년들과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쓴 `국경의 밤'·`상병의 벗'·`전야' 등 항일극을 야전병원과 군부대에서 공연하여 사기를 북돋우는 문화선전 활동을 주도하였다.
1942년 4월 1일 한국광복군 제2지대 개편 시 정훈조장으로 활동하다가 동년 10월 27일 안훈이 정훈조장이 되고 그는 조원으로 활동하였다.
항일전이 장기화되자 정규 군사교육을 이수하여야 되겠다는 절실한 필요에 따라 1940년 성도의 중국육군군관학교 제18기생으로 입교하여 1943년 1월 제1총대 통신병과를 졸업하였다.
1943년 8월에는 한국독립당 제3차 전당대회에 참가하여 중앙집행위원회 상무위원 겸 선전부 주임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4년 6월 19일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기구 확대 강화에 따라 문화부 편집위원과 선전부 편집위원으로 동년 8월 21일까지 활동하였다.
그 후 1944년 이범석이 이끄는 한국광복군 제2지대의 정훈조장으로 활약하면서 미국정보처(O.S.S) 두곡지대(杜曲支隊)에서 교육훈련을 받았으며 국내정진군 황해도 지방반장으로 임명되어 국내진공을 준비하고 있던 중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이하였다. 1946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명에 의하여 광복군을 인솔하고 귀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