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창환 (1872-04∼1937-02) 〈건국훈장 독립장〉
경기도 경성(京城) 사람이다.
구 한국군의 부위로서 국치 후 1909년 경성 양기탁 가에서 신민회 간부회의를 열고 이시영의 6형제와 이상룡, 김동삼 등과 만주로 건너가서 1910년에 신흥무관학교를 창설하고 교관으로서 간부양성에 힘썼으며, 1922년에는 통의부 사령장으로서 활동하다가 1937년 2월 12일 중국 남경에서 서거했다.
▲ 이진산(李震山) 李壽榮, 李尹明 (1880∼미상) 〈건국훈장 독립장〉
1910년대 신흥무관학교를 후원하고, 1919년 한족회 법무부장으로 활동했으며, 동년 9월부터 1921년 9월까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하고, 1921년 임시의정원이 태평양회의에 보내는 독립청원서에 서명했으며, 동년 5월 상해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분규를 비판하고 독립운동단체의 결집을 촉구하는 격문을 배포했으며, 1922년 7월 상해 소재 時事策進會 회원으로 활동하고, 동년 10월 국민대표회의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파견되어 개조파 소속으로 활동하는 한편 1923년 1월 특별심사위원·의정기초위원에 임명되었으며, 동년 9월 중한호조사 사원으로 활동하고, 1924년 7월 전만통일발기문에 서로군정서 대표로 서명하였으며, 1925년 1월 정의부를 결성한 후 동년 3월 동부 법무위원장에 임명되고, 동년 8월 정의부 중앙행정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1926년 12월 조선혁명자후원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윤덕보 (1881∼미상) 이명 尹秉用, 尹秉庸, 尹秉鏞, 尹炳龍, 朴時彬, 朴時和, 尹竹甫 〈건국훈장 독립장〉
함남 홍원(洪原) 사람이다.
1919년 3월 함남 홍원에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장백에 근거를 둔 대한독립군비단에 가입하고,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동단의 재무부장, 16도구 신창동의 통신사무국 대리, 군비총단장으로 활동하였고 1921년 10월 장백에서 군비단, 흥업단, 대진단, ‘광복단’, 태극단이 연합하여 결성한 대한국민단의 총무로 활동하면서 무장항일세력을 후원하기 위한 농민회를 조직하였으며, 1922년 8월∼1923년 7월까지 광정단의 총무장 및 단장으로 활동하였으며 1923년 국민대회에서 창조파의 위원으로 참여하였고 1924년에 국무령 이상용에 의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24년 가을 이후 정의부의 중앙행정위원장과 외교위원장으로 동변도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고 1927년 8월 이후 길림성 부근에서 정의부의 특별위원으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 김원식 (1889-08∼1940-01) 〈건국훈장 독립장〉
경북 안동 사람이다.
1919년 안동지방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도만하여, 봉천성 망명 서로군정서 가입 서로군정서에서 군자금 모집 교포 및 동지의 원호에 전력하였다.
1921년 독변 이상룡의 지령을 휴대하고 잠입국 경도 각지에 연락 군자금 모집 다시 중국으로 방대.
1922년 일 주구기관 숙청 대열의 중심 참모로 활약.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동북면 군사연락위원으로 북경에 주재하여 활약하였다. 통의부, 참의부, 군정서를 통합 정의부 조직할 때 김동삼, 오동진, 현익철, 이청천, 김상덕, 이규사와 같이 중앙집행위원에 병출.
1922년 임정 지령으로 이규사와 같이 동북군사연락위원으로 북경에 상주하여 60여 명의 학생을 남경 등지에 유학시켰다. 중국군 참모장 희흡과 군사동맹 체결 시 72명 한국 측 대표 병출.
만주사변 후 동북군사위원으로 활동 중 밀고로 피체 간도형무소에서 2년간 예심에 회부. 국내에 이감되어 다시 길림에 추방당하였다.
1927년 농민호조소를 발기 설립하여 활약했다.
1928년 삼부 합작 시 정의부 대표로 김동삼과 같이 통합에 진력했다.
만주 사변 후 동북군사위원으로 활동 중 밀고로 일경에 피체. 간도의 형무소에서 2년간 예심 끝에 국내로 이감되어 옥고를 겪다가 석방 후 길림에 와서 계속 활동하다가 길림성 강동촌에서 독사하였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