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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벨라 멘지스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데이지 호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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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벨라 멘지스
1856년 7월 30일경 호주 빅토리아(Victoria)주 발라렛(Ballarat)에서 태어났다. 1891년 10월 12일 호주 선교사로 부산에 부임했다. 1895년 부산·경상남도 지역 최초의 근대 여성 교육기관인 일신여학교를 설립하여 초대교장이 되었다.
1919년 서울의 독립선언 이후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가 부산상업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고등과 학생들에게도 3.1운동을 알렸다.
1919년 3월 10일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 11명이 벽장 속에서 태극기 50매를 제작하였다. 기숙사 감독 이사벨라 멘지스(Isabella Menzies)가 깃대 등 태극기 제작 재료를 제공하였다.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고 주모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 교사와 학생들이 검거된 직후 일제 경찰이 마가렛 데이비스와 데이지 호킹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유치장에 가뒀다.
멘지스는 일제의 감옥에 있는 동료 교사를 석방시키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 결과 데이지 호킹과 마가렛 데이비스는 3월 13일까지 부산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이후 일신여학교 기숙사 감독 멘지스는 증거인멸을 위해 태극기를 소각하였다. 일제는 국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이사벨라 멘지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
1919년 부산 일신여학교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1919년 3월 서울의 독립선언 이후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가 부산상업학교와 연락을 취하고 고등과 학생들에게도 3.1운동을 알렸다. 1919년 3월 10일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 11명이 벽장 속에서 태극기 50매를 제작하였다.
3월 11일 수업을 마치고 기숙사로 돌아와 저녁 식사를 마친 고등과 학생 김응수 등 11명은 교사 주경애·박시연과 함께 태극기를 손에 들고 좌천동 방향으로 이동했다.
이때 교장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Magaret Sandeman Davies)과 여교사 데이지 호킹(Daisy Hocking)도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 현장으로 이동하면서 학생인솔 및 보호를 하였다.
이러한 일신여학교 학생들의 만세 시위에 수백 명의 군중이 호응하였고 주모자 전원이 체포되었다. 이들 교사와 학생들이 검거된 직후 일제 경찰이 마가렛 데이비스와 데이지 호킹을 경찰서로 연행하여 유치장에 가뒀다.
데이지 호킹과 마가렛 데이비스는 3월 13일까지 부산진경찰서 유치장에 갇혔다가 석방되었다. 일제는 국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여 마가렛 샌더먼 데이비스에게 기소유예 처분을 내렸다.
정부는 2022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 데이지 호킹
호주 빅토리아(Victoria)주 퀸클리프(Queenscliff) 출신 선교사이다. 1916년 3월부터 호주 선교사로 경상남도 마산(馬山)에서 한국어 교사로 근무하고 한국 어린이들을 보살폈다.
1918년부터 호주 장로교가 경영하는 부산의 일신여학교(日新女學校)에서 여성을 교육하고 기독교를 전도하였다.
1919년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일신여학교 교사 주경애(朱敬愛)가 부산상업학교와 연락하고 일신여학교 고등과 학생들에게 시위 발생 사실을 알렸다.
3월 11일 여교사 데이지 호킹과 교장 마가렛 데이비스(Magaret Davies)는 학생들과 함께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 당시 데이지 호킹은 학생들에게 시위를 권유하며 함께 행진하였다. 이러한 일신여학교의 만세 시위에 수백 명의 군중이 참여했고 두 시간 후 일제가 주모자 전원을 체포하였다.
이어서 데이지 호킹과 마가렛 데이비스도 체포되었다. 데이지 호킹과 마가렛 데이비스는 3월 13일까지 부산진경찰서 유치장에 구류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국제적인 갈등을 우려한 일제 당국은 데이지 호킹 등을 기소하지 못하고 불기소 처분하였다.
정부는 2022년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방병건 회장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