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기동(柳基東)
일찍이 만주로 건너가 1920년 봉천성 무송현(撫松縣)에서 조직된 흥업단(興業團)에 가담하여 항일무장 활동을 하였다.
1924년 봄 하얼빈(哈爾濱) 일총영사관 순사부장 국길정보(國吉精保)와 형사부장 송도(松島) 등이 독립투사들을 함부로 해친다는 정보를 듣고 이들을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서로군정서원(西路軍政署員)인 김만수(金萬秀)·최병호(崔炳鎬) 등과 동년 4월 6일 하얼빈 18도가 평강리(18道平康里)의 중국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계획을 숙의 중 일경에 탐지되어 포위당했다.
그날 밤 12시에 일경 10여 명을 거느리고 습격하던 국길정보(國吉精保)를 현장에서 사살하였으며, 동 여관이 벽돌집으로 이들을 쉽사리 체포할 수 없게 된 일경은 8일 오후까지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다. 이에 중국 측에 강권하여 중국군 2백여 명의 증원을 받아 항복을 권고하였으나 “일본인의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절대 불응하였다. 일경은 동일 오후 1시경에 폭탄 10여 개를 투척하여 가옥을 파괴하고, 260발의 탄환을 퍼부어 잔인하게 무차별 사격을 하였다.
그를 비롯한 동지 3명은 현장에서 무참하게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만수(金萬秀)
경북 안동 사람이다.
1910년 일제가 한국을 강점하자 김지섭(金祉燮)·김재봉(金在鳳)·김응섭(金應燮) 등과 같이 항일투쟁을 결의하고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동지 유기동·최병호와 함께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24년 4월 7일에는 참의부원(參議府員)으로서 임무를 띠고 하얼빈에 체류하던 중, 일경에 발각되자 일영사(日領事) 국길정보, 형사부장 송도(松島) 등 10여 명을 사살하고 최병호·유기동과 함께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최병호(崔炳鎬)
강원도 사람이다.
어려서 부모를 따라 만주에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1919년 3·1독립운동이 국내외에서 거족적으로 일어나자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전전하면서 동지를 찾아다니다가 왕청문 영안(旺淸門寧安)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1년 봄에 서로군정서가 북진군(北進軍)을 새로 편성한다는 소식을 듣고 응모하여 그 헌병대원이 되었다.
1923년 참의부(參議府)에 가담하였으며, 1924년 4월 8일 김만수, 유기동과 함께 하얼빈도외 남십팔도구(哈爾濱道外南十八道溝) 중국여관 동발잔(同發棧)에서 일본영사관 순사부장 국길정보를 사살하고 일경 2백여 명에게 포위되어 계속 교전하다가 항복 권유를 받자 “일본인의 앞에 항복하려면 차라리 죽고 말겠다”고 버티었으며 결국 폭탄과 집중사격에 의하여 동지 2명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