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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국가보훈부 제공] |
▲ 채찬
충북 충주 사람이다.
1905년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 무력투쟁을 전개하였다. 1910년 남만 지역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학을 전공하였다. 졸업 후에는 백서농장을 만들고 둔전제로 군인을 양성하였다.
3·1독립운동 이후에는 모험대를 조직하고 국내에 진입하여 적 기관을 파괴하고 적의 밀정을 처단하는 데 주력하였다.
1920년 본부가 길림 방면으로 이동한 후에는 의용군을 조직하여 활동하였다.
5월에는 강계군 문옥면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7월에는 이덕창을 시켜 친일파인 후창군수 권응규를 사살하게 하였다.
1921년에는 관전현에서 일경을 격퇴하였을 뿐만 아니라 친일기관인 일민단·보민회·강립단 수십 개소를 습격하여 제거하였다.
또 의용단 결사대 수백 명을 조직하여 강계 어뢰면 주재소를 공격하기도 하였다. 독립신문의 한문판을 발행하는 자금을 제공하였다.
또한 1922년에 대한통의부에 가담하여 무장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전덕원 등과 의견 마찰로 통의부가 분열되자 남만의용군 대표로서 상해임시정부에 파견되어 교섭한 결과 임시정부 직할의 주만참의부를 설립하게 되었으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4년 5월에는 이의준·김창균에게 국경을 순시하던 재등실(사이토 마코토) 총독을 저격하도록 지시하여 적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창균
평안북도 창성 사람이다.
김창균은 대한독립단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1910년 한국이 일제에 의해 강점된 후 서간도 지역에서 보약사·향약계·농무계·포수단 등 단체를 조직하고, 독립역량을 기르던 중 3·1운동이 발발하자 이를 계기로 기존 단체를 통합하여 무장투쟁을 추구하고자 했다.
대한독립단 창립총회에서는 창립선언문과 함께 전문 22조의 규칙을 통과시키고 임원을 선정하였다.
무장투쟁을 위한 무기 및 군수품을 구입하기 위해 군자금의 모집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 되었다. 따라서 대한독립단에서는 유하현 삼원보에 위치한 본부 및 국내, 서간도의 각 지단에 재무부를 설치하고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적극 추진했다.
김창균은 1922년 봄 군자금 모집차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 청풍동 주재소를 습격하여 일경과 교전하였으며, 위원군 송면 석포동에서 밀정 송의봉을 사살 처단하였다.
1923년 음력 정월에는 대한통의부 의용군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대한통의부는 1923년 12월에 조직을 개편하여 보다 군사적인 면에 비중을 두었다.
김창균은 이 대한통의부의 소대장 참위 전세웅의 부하가 되어 국내에 진입하여 강계군 어뢰면 풍룡동 골짜기에서 평북 경찰부 수색대를 저격하기도 하였다.
김창균은 1923년에는 참의부에 가담하여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중앙의회를 가지고 군사와 민정을 아울러 통괄하는 단체였다.
1924년 8월 1일에는 이두성의 지휘하에 단원 6명과 함께 위원군 화창면 주재소를 습격하였고, 그 후 각지에서 군자금을 수합하였다. 김창균은 1926년 9월 13일 중국 유수림자 강구로부터 평북 위원군 서태면 신천동으로 건너오다 위원경찰서에 체포되었다.
신의주지방법원에서 1928년 3월 14일 사형이 구형되었고, 9월 15일 평양복심법원에서도 사형이 구형되었으며, 11월 6일 평양복심법원에서 사형을 받았으나 유인 즉위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장창헌
평북 용천 사람이다.
1919년부터 의용군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참의부는 활발한 군사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백광운과 최석순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백광운이 피살된 후에는 최석순이 군사활동을 주도하였다. 참의부는 압록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참의부 군대는 1924년 4월부터 7월 16일까지 20차례 정도 국내에 진격하여 군자금 모금 및 무장활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특히 평안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장창헌은 1924년 7월 13일 강계군 종서면 황제동에서 밀고로 일경과 교전 중 동지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 이춘화
평남 대동 사람이다.
1919년부터 의용군으로 활동하였고, 1923년에는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의 하나인 참의부에서 활동하였다.
이춘화도 참여한 참의부의 군사활동은 국내진격전으로 대표된다. 참의부는 압록강 유역과 접하고 있다는 지리적인 이점을 최대한 활용하여 국경을 넘어 일본군 초소를 습격하는 등 활발한 대일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춘화는 1924년 7월 13일 강계군 종서면 황제동에서 밀정 우윤홍·홍인화 등의 밀고로 일경과 교전 중 동지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