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제공 : 국가보훈부]
|
▲ 황진남(黃鎭南)
함경남도 함흥(咸興)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부모님을 따라 하와이로 이민을 갔다.
한인기숙학교를 졸업한 황진남은 1910년 9월 호놀룰루 마노아벨리에 있는 중앙태평양학교 8학년에 입학하였다. 1919년 캘리포니아대학을 다녔다. 3월 국내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이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에 전해지자 샌프란시스코의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에서는 3월 15일에 재류동포전체대표회를 열고 독립운동 방침을 결정하였다. 중앙총회장 안창호(安昌浩)를 재미한인의 대표로 선정하고, 황진남과 정인과(鄭仁果)를 통신원으로 임명하여 중국 상하이에 파견하기로 결정하였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성립되고, 13일에 대한민국 임시의정원법을 제정하여 지방회는 국내 8도, 노령·중국령·미국령 등 11개 지방으로 구분하였는데, 황진남과 정인과가 미국령 대의사로 선출되었다. 황진남은 안창호의 비서로서 그를 도왔으며, 중국 현지 영자신문 등에 일제의 한국통치 실상을 알리는 영문선전의 문서를 작성하였다. 1920년 2월 임시의정원 상임위원회 제5과(교통)의 상임위원이 되었다.
1920년 8월 8일 황진남은 상하이의 대동여사에서 개최된 유학생 주최 미국의원단 환영회에 참석하였다. 황진남은 여운형·장덕준과 함께 8월 16일 미국 하원의원 쵸스타를 방문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 실상을 설명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 등 제반 문서를 제공하였다. 이 같은 외교활동으로 황진남은 9월 29일 임시정부 외무부 참사(參事)에 임명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던 황진남은 베를린대학에 입학하여 광산학을 전공했다. 황진남은 다시 프랑스 파리로 가서 소르본대학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다. 파리에서 유학하던 시절 그는 ‘시몬흥’이라는 프랑스인과 결혼을 하였다. 프랑스에서 유학을 마치고 1938년 9월 귀국하여 함흥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8.15해방 이후 월남하여 1946년 12월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선임되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자 미국 육군성 소속으로 일본으로 가서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이라는 한국어 방송을 하였다. 1970년 5월 13일 사망하였다.
정부는 2019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이의경(李儀景)
황해 해주(海州) 사람이다.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學專門學校) 재학 중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세 시위에 참여했고, 이후 1919년 5월 외교활동을 독립운동의 행동 지침으로 표방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이 결성되자 이에 가입하여 동단의 편집부장(編輯部長)으로 활약했다.
동단은 본부인 중앙부(中央部)를 서울에 두고, 국내 각처와 해외조직으로서 상해(上海)지부를 설치하였는데, 중앙부의 부서 구성은 총무(總務)를 비롯하여 외교부(外交部)·재무부(財務部)·편집부(編輯部)·외교원(外交員)·외교특파원(外交特派員) 등으로 이루어졌다. 동단의 활동은 외교선전활동이 주된 것으로서 외교원의 해외 파견 및 기관지 〈외교시보(外交時報)〉 등 선전물을 발간하였다.
이의경은 동단의 편집부장으로서 〈외교시보〉의 발간을 주도하였고, 또 동단에서 1919년 8월 29일 국치기념일(國恥紀念日)을 기해 거행한 만세 시위 때 사용되었던 〈경술국치 경고문〉 등의 선전물 인쇄를 책임 맡았다.
이렇게 선전물의 발행을 주관하며 활동 중, 동년 11월 말 동단의 조직이 일경에 발각됨으로써 붙잡혀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3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다.
▲ 김갑수(金甲洙)
충남 서천(舒川) 사람이다. 1915년 월남 이상재(李商在)와 함께 중국 상해(上海)로 건너가 남양(南陽)대학에 다니면서 여운형(呂運亨)·서병호(徐炳浩)·조동호(趙東祜) 등과 교류하였다. 그는 여운형이 이끄는 전 중국대학 축구 대표선수로 선발되어 필리핀에 원정을 가 일제 침략의 부당성을 세계에 호소하고 우리 민족의 자주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상해의 재해외(在海外) 조선인 유학생회를 주도하였다. 1918년 애국동지들을 규합하고자 국내에 진입하였으나 군산에서 일경에게 붙잡혀 고문을 받다가 한국인 간수의 도움으로 탈출하여 상해로 갔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의정원 의원으로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였다.
이 당시 그는 임시정부 발행채권을 가지고 국내에 들어와 전북 임피(任陂) 등지에서 독립운동 자금모집에 노력하였다. 그 후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선으로 독일 베를린에 유학 중 베를린 고려학우회(高麗學友會)를 조직하여 활동하기도 하였다. 1926년 귀국하여 이상재의 권유로 배재학교 교감으로 7개월간 근무하였으나, 일경의 탄압으로 북간도 용정(龍井)으로 건너가 동흥(東興)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다. 1927년 다시 귀국한 그는 민족자본의 육성을 위해 전북 완주 봉동에서 윤건중(尹建重)이 설립한 봉우산업조합에 참여하여 이사로 활동하다가 1938년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