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세윤
1896년 의병 400인을 규합하여 안동의장 김도화 진중에 들어가 오장이 되어 활동하다. (폭도편집자료 27호 p.73)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재거, 영천의장 정용기와 합세하여 도찰사 정환직과 모의활동을 하였다. (폭도편집자료 27호 p.73)
1908년 정환직 사후에 의병장이 되어 청하, 청송, 영천, 의성 등지에서 항전하였으나 일본의 현상금 수색으로 피체되었다. (영남출신 독립운동약전 1집 p.223) 대구지방법원에서 10년형을 받다. (대구지방법원 판결문 등본)
8년 복역 후 단식순국하다. 큰아들 최산두도 아버지의 소재를 알리지 않았다 하여 체포되었고 함구하다가 옥중에서 순사하다. (영남출신 독립운동약전 1집 p.223)
▲ 정원집
서울 사람이다.
정철하 의진과 전해산 의진에 가담하여 경기도와 전라도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대한제국 근위병 참위 출신인 정원집은 1907년 음력 9월 10일 동지 이봉래와 함께 정철하 의진에 투신하여 의병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경기 광주군 일대에서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붙잡혀 같은 해 11월 30일 평리원에서 유형 10년을 받았다.
그는 1908년 6월 유배지인 전라도 지도(智島)에서 탈출하여 이후 전남 광주·함평·나주·장성 등을 중심으로 활동한 전해산 의병진에 참여하여 7월 29일 선봉장(先鋒將)으로 활약하면서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는 8월 13일 이래 함평지방을 중심으로 수십 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그 앞잡이를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여 수많은 적을 처단하였고, 1909년 1월 말 의병의진을 나누어 나주 고막원(古幕院)에 있는 일본군 병참을 공격하였다.
이 싸움에서 일본군 5명을 사살하고 수많은 무기를 노획하였다. 이 과정에서 부하의 오발로 인해 부상, 귀대하였다가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김영백
전남 장성 북이면 달성리 사람이다.
정미조약(丁未條約)이 체결되고 이어서 군대마저 해산되어 일제의 식민지화 추진이 노골화 되어가자 국권을 회복할 목적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그는 1907년 10월 전남 장성군 북이면에서 동지 약 1천 명을 규합하여 부하를 삼고 스스로 대장이 되었다.
1908년 음력 3월 4일 정읍 단곡리에 주둔하고 있는 수비대의 기병을 기습·공격하였다. 7월에는 흥덕군 소속 수비대 보병과 격전을 벌였다. 9월 21일 방장산(方丈山) 산록 백계동에서 수비대의 기병과 헌병 및 순사대와 교전하였다.
10월 상순 장성군 북이면 신기리에서 교전하였고, 11월 상순에는 동군 오현에서 헌병과 교전하였다.
1909년 1월 말경 동군 북이면 상곡리에서 수비대 기병과. 2월 중순에는 동군 북일면, 2월 말에는 흥덕군 세곡리, 4월 11일에는 동군 일동면 구수교, 4월 중순에는 고부군 강고리, 4월 말경에는 흥덕군 일남면 유점리에서 각각 일본헌병과 전투하고 상호 간에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12월 적에게 노출되자 일본헌병대 고부 분견소에 자수하였다. 12월 20일 재판에서 교수형이 확정되어 1910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8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2024년 11월의 독립운동가
독립유공애국지사유족회
방병건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