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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그때 그 시절]격동의 시절 우리는 이렇게 살아왔었다

대한민국이라는 가난한 나라가 세계 12위 경제대국으로 발전했다.
해외원조를 받던 나라는 해외원조를 하는 나라가 되었다.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터로 나갔으며, 독일·중동으로 떠나 돈을 벌어왔다. 사회는 민주주의를 완성해 나갔다. 
 
세계 그 어느 나라도 이룩하지 못한 쾌거이자 자랑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세대가 이룩한 자랑스러운 역사다.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유수와 같다. 
 
그때 그 시절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왔을까?
그때 그 시절을 찾아 떠나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 시절 우리의 가슴을 울리던 것들을 찾아 추억여행을 떠나보자.

[MOVIE] 미워도 다시한번 : 정소영 작(1968년)

1968년 정소영 감독이 만든 `미워도 다시 한번'은 1961년 큰 흥행에 성공한 최은희 주연의 성춘향의 기록을 깬 작품이다.
1968년 개봉된 1편은 당시 관객 수37만이라는 어마어마한 성공을 거뒀다. 이 성공으로 1971년까지 해마다 속편이 제작되었을 정도다.
신영균, 문희, 전계현, 김정훈 등이 출연한 이 작품은 유부남 신호(신영균)의 아이를 가진 혜영(문희) 그리고, 태어난 아이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다. 이야기 자체는 단순하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내용으로 큰 인기를 끌었다.
혜영(문희)은 신호(신영균)가 유부남인지 모르고 그를 사랑하게 된다. 혜영은 신호와 결혼을 꿈꾸지만 신호는 진실을 얘기하지 못한다. 결국 시골에서 신호의 아내(전계현)와 자식이 상경해서야 혜영은 그 사실을 알게 된다. 혜영은 신호 곁을 떠나 혼자 신호의 아들 영신(김정훈)을 낳아 기른다. 하지만 8년 후 그녀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신호를 찾아가 아이를 길러줄 것을 부탁한다.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여 외로운 나날을 보내고 엄마만을 찾는다. 외로운 영신은 엄마를 찾아 나왔다가 길을 잃어버리고, 집안사람들은 영신을 찾아 나선다. 집을 찾아온 영신을 혼내는 신호를 훔쳐 본 혜영은 영신을 자신이 키워야겠다고 결심한다. 신호의 가족들도 영신을 혜영의 품으로 돌려보내기로 하고 혜영은 신호를 데리고 시골로 내려간다. 
혜영 역을 맡은 문희의 눈물 연기가 주목을 끌었으며 아역 배우인 김정훈의 눈물을 자아내는 연기도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렸다. 당시 남아있던 일부다처제를 다룬 작품으로 처첩과 남편 사이의 갈등이라는 소재가 인기를 끌었고 그 인기에 힘입어 속편이 계속 출시되었지만, 원작만큼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속편에서는 아이들이 자란 이후를 다루었는데, 김정훈의 성인 역에 노주현이 캐스팅되어 눈길을 끌었다.
 80년대에 한 번, 2000년도에 한 번 리메이크(또는 이야기가 이어지지 않는 속편)가 되기도 했다.
 [자료참고=한국영상자료원]


[STAR] 영원한 미남배우 신성일

지난 2018년 폐암으로 사망한 배우신성일은 서양 미남 배우의 대명사격인 알랭 들롱과 비교되는 당대 최고의 미남 인기스타였다. 
그 인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전성기 시절에는 하루를 넷으로 쪼개 영화를 촬영했다고 한다. 그가 출연한 작품만 500여 편이 훌쩍 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960년대 당시 배우 출연료가 보통1만 8,000원 선이였는데 신성일 출연료는 45만 원을 받았다고 한다.
1937년 5월 대구에서 출생한 신성일의 본명은 강신영이다. 배우로 데뷔하면서 신상옥 감독이 신성일이라는 예명을 붙여주었고, 이후 정치활동을 위해 성인 강을 붙여 강신성일로 개명하기도 했다. 
1960년 《로맨스 빠빠》로 영화계에 데뷔한 신성일은 《맨발의 청춘》을 비롯한 수 편의 청춘 멜로 영화에 배우 엄앵란과 주연을 맡아 큰 인기를 누렸다. 맨발의 청춘,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 등 1960년대부터 90년대에 이르기까지 5백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고, 1968년과 1990년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비롯하여 백상예술대상 남자최우수연기상,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남우주연상 등 국내 대부분의 영화제를 휩쓸었으며, 대종상 공로상과 부일영화상 공로상을 수상했다. 2018년에는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 수여하는 제8회 아름다운문화예술인상 공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신성일 하면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배우 엄앵란이다. 1964년에는 영화 <맨발의 청춘>에서 함께 공연한 인연으로 둘은 결혼을 했다. 당대 세기의 결혼으로 주목을 끌었다. 신성일은 정치에도 참여했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국민당 후보로 마포구 -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했지만 낙선했고, 이후 이름을 강신성일로 개명하고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신한국당 후보로 대구광역시의 동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4년 후인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됐다. 화려한 인생만큼이나 구설수도 많았다. 잦은 여성편력으로 부인인 엄앵란과 오랜기간 별거를 했으며, 국회의원시절 받은 뇌물로 실형을 선고받기도 했다.


[ACCIDENT] 대연각호텔 화재사고

1971년 크리스마스 아침 서울 중구 충무로동에 위치한 대연각(大然閣) 호텔에서 최악의 화재 사고가 발생했다.
18시간 만에 진화된 이 화재로 16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당했으며 25명이 실종됐다. 1970년대를 대표하는 대규모의 재난사고로 재산 피해는 당시 소방서 추정으로 약 8억 3,820만 원이었다.
오전 9시 50분경 1층 커피 숍에서 발생된 이 화재의 원인은 프로판 가스통이 폭발하면서 시작되었다. 카운터에는 프로판 가스 화덕이 있었는데 사고 당일에 예비용으로 20kg 프로판 가스통이 하나 더 있었고 이 예비 용기의 가스를 잘못 방출시켰거나, 혹은 가스가 샌 상태에서 화덕으로부터 그 가스에 불이 옮겨 붙은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더욱이 빌딩 내장재가 대부분 가연성 물질로 가득했기 때문에 불은 순식간에 번져 나갔고 비상구 등 안전 대책이 전무한 실정이었다. 당시 호텔 주변에는 5층 내외의 낮은 건물이 바짝 붙어있었기 때문에 그나마 낮은 층에 있던 사람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옆 건물 옥상으로 뛰어내리거나, 커튼·침대 시트 같은 걸 뜯어서 줄을 만들어 타고 내려오기도 했다.
당국은 이 화재를 진압하기 위해 가용 가능한 모든 소방차를 총 동원했고, 소방은 물론 군·경, 주한미국 소방차와 헬기까지 동원되어 진화에 나섰고 박정희 대통령까지 현장을 찾아 진화를 독려했지만 250여 명의 사상자를 낳은 대참사가 되었다. 
수많은 투숙객이 유독가스와 열기를 이기지 못해 창밖으로 뛰어내리는가 하면 이 광경이 TV 생중계로 보도되어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며 사건 당일은 크리스마스였기 때문에 호텔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있었던 상태라 엄청난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1972년 서울시민회관 화재, 1974년 청량리 대왕코너 화재사고와 함께 서울 3대 화재사고로 손꼽히고 있으며, 아직까지도 세계 최대의 호텔 화재로 기록되고 있다. 지난 2001년 미국에서 발생한 9.11 테러 이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건물 화재 참사로 꼽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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